기본

진리의 삶(말씀)은 영원히 실패인가?

참 나 2024. 10. 29.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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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리의 천하통일; feat 老子의 無爲 -

석가모니(佛의 慈悲), 노자(無爲), 예수(사랑), 증산(解寃相生)의 위대한 사상들은 모조리 실패했다! 인류의 위대한 성자, 성현들이 공통적으로 說하신 '연기법' 진리는 지금 세상살이의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단 말인가? 그 후계자들이 만든 전례 의식(典禮儀式)으로서의 종교 얘기가 아니다. 진리 말씀 그 자체가 살았냐 죽었냐를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살이 삶의 현장, 어느 구석을 살펴봐도, 성현의 진리말씀인 '연기법'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 실패했다'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신(神)과 동격으로까지 격상시킨 예수의 말씀도 마찬가지다. 기독교, 가톨릭의 목회자, 신도들은 생활 속에서 진리의 실천은 고사하고 예수님 말씀의 핵심이 뭔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불교를 보라! 작년에 자화장(自火葬)이란 역대급 뻘짓을 한 자승 스님을 예로 들 것도 없다. 불교경전들의 핵심인 반야심경의 '연기법'(緣起法)을 풀어내지 못하고 있다,  

​저는 지금 인터넷 블로그에 진리의 말씀을 설명하는데, 가령, 길거리에 나가서 '연기법'을 설명한다고 했을 경우에 어느 누가 쳐다보기라도 하리오? 관심 있는 사람이 없다, 그게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성현의 말씀이란 것은 현실(속세) 삶의 진리가 아니라, 피안(彼岸; 저세상- '판 밖')의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런즉, 진리(의 말씀)는 진즉에 죽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철학자 니이체가 말한 '신(神)은 죽었다'라는 말과 같은 맥락입니다.

​​앞으로는 어떠한가? 지금처럼 (a) 진리 간판을 내걸고 그걸 우려먹으며, (b) 허깨비 같은 신(神)으로 혹세무민(惑世誣民) 하는 종교 사업이 있을 따름이로다. 만약, 그리하지 않고 '정말로' 진리 위주의 종교를 펼치고자 나선다면, 그런 일은 아무리 길어도 한 두 해나 갈까 말까 다, 사람들의 철저한 무관심으로 인하여 얼마 못 가서 문을 닫을 것입니다. 예수 사후의 기독교 현실이 그러했으며, 작금의 진리에 대한 세태(世態)가 그러하다. 이렇듯 지금 세상은 영성의식(靈性意識; 뭇 생명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기운, 하나님 - 神)이 고갈되어 버렸습니다. 

​​'연기법' 진리란 무엇을 말하는가? 이 세상에 (소수의) 큰 놈이 으스대는 것은 (다수의) 작은 놈이 바탕에 깔려있는 연고로다. 그러하니 큰 놈은 작은 놈한테 '존재의 빚'을 지고 있는 셈인즉, 작은 놈을 대할 때는 마땅히 자비(慈悲), 사랑, 상생(相生)의 정신으로 대할 줄 알아야 하느니라. 자, 어떻습니까? 이것이 정확한 '깨달음'인데, 이 판밖의 진리에 대하여 손톱만치의 관심이라도 있나요? 여기서 '큰 놈'이라고 뭉뚱그린 것은, 이 속세(俗世)에서 너무도 당연시하는 - 편협하고 맹목적인 - 가치 추구 행위를 말합니다. 즉, 돈과 명예, 권력, 건강 그리고 좋다고 여기는 온갖 행복의 가치들입니다. (※ 後天, 太乙세상:  작은 놈(=乙)들도 더 이상 무시당하며 살지 않는다. 개벽세상:  지식, 정보, 통신, 세계화, 매스커뮤니케이션 사회, 자유민주화 대중권익 평등 사회 =乙세상)

​​​앞으로 저 '판밖의 진리' 말씀이 빛을 보는 때가 있을까? 선인들 말씀에 의하면 '그런 일이 닥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소위 말하는 '그날'이 머지않았다, 더 이상 맨정신으로는, 이대로는, 살아갈 수 없는 험한 지경을 맞이하리라, 우리나라 학생 애들의 1/4이 정신과 치료를 필요로 한다는 통계(統計)는 이미 그 자리에 들어섰다고 봅니다. 진리의 삶(말씀)이 아니고서는, 지금과 같은 속세(의 삶)란 것은 지탱할 수 없고, 그리되어서도 안된다.(unsustaina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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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노자(老子)의 무위(無爲)는 연기법 얘기였다. 사람들은 연기법을 모르니 '무위란 바로 연기법'이다 라고 말할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도덕경 제2장에 예시한 有無, 難易, 長短, 高下, 音聲, 前後(先後)...는 서로 상반된 것(상보적 가치)들입니다. 풀이하자면, 취사심(取捨心)의 배제(排除)인바, 서로 상반된 어느 한 쪽의 가치를 편애(偏愛) 하지 않는다 란 뜻으로서의 '무위'(취함이 없음)였던 것이다. 불가 반야심경에서 시제법공상(是諸法空相, 제법이 공한 모습)이라 하여 例를 든 '生과 滅(불생불멸), 垢와 淨(불구부정), 增과 減(부증불감)'도 같은 말씀이었다. 도덕경 2장에 이어서 나온 문제의 生而不有(생이불유)를 봅시다; 비롯되어 생겨났으되, 그 자체만 가지고서는 '있는 것'이 아니다란 뜻입니다(=제법무아. 천당은 지옥이 있을 때 비로소 천당인 것이요, 만약 지옥이 없다면 천당은 무엇으로 그 '좋음'을 자랑하리오?) 이렇듯 만사는 상대적 가치일 뿐이로다, 제 혼자만으로는 (또는 絶對的으로는) 그 좋고, 나쁨이 드러나지 아니한다! (=제행무상. '깨끗해서 좋다'라는 가치는 다름 아닌 '더러운 것은 싫다'라는 선입견을 바탕에 깔았을 때 드러나는 것이다. 즉, 온 세상이 이미 다 깨끗하다면 더 이상 '깨끗하다'라는 좋은 의미는 설자리가 없는 것이다. 다른 예; 더러운 흙탕물에 핀 蓮 꽃을 아름답다고 칭송하는 이치). 이것이 바로 佛家(불가)의 삼법인 중 諸法無我(제법무아), 諸行無常(제행무상)입니다. 노자의 도(道)는 진리(眞理)의 다른 말로서, 佛家의 연기법이었다. 이로써, 석가세존, 노자, 예수, 증산 등 聖賢의 말씀은 모두 연기법으로 귀결되고 관통한다는 것을 제가 인류사상 처음으로 밝혀서 쉽게 설명해 냈습니다. 노자의 도덕경은 도대체 무슨 말씀인가 하는 의문은 이로써 사라졌고, 眞理의 天下統一이 이루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