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봤어도 안 보이고 들었어도 못 듣는, 시지불견 청지불문(視之不見 聽之不聞)

참 나 2024. 8. 31. 11:52

한 달 여 만에 글쓰기에 돌아왔습니다. 3년 전 8월에 차입한 가계자금의 만기가 돌아와서 차환하느라 분주했네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초전도체 주식에 가용자금이 잠기는 통에 생활비를 대느라 힘들었지요. 2022년 초, 나한테 드디어 대운이 왔구나 하고 확신하였던바, 이 흐름의 정체로 말할 것 같으면, '죽을 만큼 힘들지만 결국 극복해 낸다'라는 것이었으니, 이에 관한 얘기는 다음 기회에 더 하겠습니다. 지독한 장마, 폭염경보, 열대야 속에서도 아침 7시 테니스는 빠지지 않았고, 파이 소수점 이하 3천 자리까지 외우기(기억유지)의 일과(日課)도 변함없으니, 오늘 아침에도 2,500~3,000자리를 복기했습니다.

사람의 인지(認知) 기능은 동물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데, 추론(抽論) 하는 기능이 그것입니다. 우리가 대상을 보는 것은 일차적으로는 눈을 통해서이지만, 그것은 두뇌의 해석을 통하여 인지(認知, cognition) 내지 인식(認識, perceive) 하게 됩니다. 즉, 눈의 각막을 통과한 것만으로는 뭐가 뭔지 모릅니다, 딴생각을 하고 있으면 (나타난) 대상을 보고서도 모른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하지만 그게 사실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믿고 있는 눈알의 '본다'라는 기능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두뇌에서 '그건 뭣이다'라고 해석해 주지 않으면 그렇다는 뜻입니다. 귀, 코, 혀, 피부 감촉이 다 그렇다; 이것이 바로 '반야심경'에서 말한 '색수상행식 역부 여시'란 말이니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이 다 마찬가지란 뜻입니다. 라디오/ TV세트는 방송국 전파의 단순 전달장치(transmitter)에 불과하듯이 사람의 입(口), 코, 눈과 귀가 그러하니, 해석과 판단은 없고 단순히 전달만 하는 것이다, 하여 근원적인 것은 두뇌의 의식(意識, consciousness)인 것이다; 의식이 해석하고 판단을 하니 내 몸의 주인(主人)이로다, 

세 살 무렵부터 지금까지 배우고 경험한 것을 통하여, 네가 지금 눈으로 본 것은 바로 이것이다(먹을 것과 못 먹을 것의 구별까지)라고 두뇌에서 해석을 해 줘야만 비로소 '이것은 무엇이란 인식을 한다'라는 얘기입니다. 정보(情報)의 재조합 과정을 통하여 우리의 보는 행위가 이루어진다, 두뇌활동, 즉 학습된 사전 지식이란 것이 얼마나 편협한 것인지, 얼마나 고정관념(선입견)의 노예가 되어 있을지, 나아가 (두뇌가) 얼마나 잘못된 해석을 할 수 있을지는 긴 설명이 아니어도 쉽게 짐작할 수 있을겁니다. 요지부동한 고정관념, 선입견/편견 그리고 착오와 착각, 그런 것이 우리가 '사물을 봤다'라는 것의 실상인 것이다, 어떤 계기로, 그러한 두뇌 지식들을 바꿨다면, 우리는 종전처럼 보거나 들을 수도, 느낄 수도 없게 됩니다 (이른바 '죽음을 맛보는' 것에 해당합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그렇다). '사람이 변한다'라는 것은 이처럼 지난(至難) 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뇌가 갖고 있는 기존 지식(고정관념, 선입견, 편견)을 '깨 부셔라'라고 주문하는 것이 '깨달음'입니다. 하여, '있는 그대로를 본다'라는 경지에 도달합니다. 산은 산, 물은 물...이란 말이 뭔 소린지 그 깊은 경지를 헤아리게 된다, 이로써, 범인(凡人)의 경지를 넘어선다, 두뇌를 컴퓨터처럼 리셋(reset) 하고 포맷(format) 하는 것이다; 자아(自我, 거짓 나)를 죽여라, 다시 태어나라(又日新), 한 알의 밀알이 썩어야 새싹이 나온다, 요단강(此岸)을 건너 피안(彼岸)에 이른다... 이러한 말들이 나온 배경인 것입니다.

더 살펴보면, 우리가 대상을 볼 때는, 저것이 움직이진 않지만, 이런 상황에서 저렇게 존재하는 것은 죽은 것일 리가 없다! 저 균형 잡힌 (각 잡힌) 자세를 보라, 저 살아있는 색깔을 보라, 숨 쉬느라 미세한 떨림 같은 배의 움직임을 보라! 우리의 두뇌는 이렇게 분석하고 저장된 지식을 통해서, 저것은 살아있네...! 라고 추론해 냅니다. 동물들은 이러한 추론 즉, 정보를 재조합하는 능력이 없습니다, 즉, 어떤 체취나 움직임도 없다, 그렇다면 없는 것이니 주변 배경에 그냥 묻혀버리고 만다, 이 상황에서 '저것은 먹이'라며 다시 덤벼들 가능성은 없으니 생존의 위기는 넘어갑니다. 단, 뱀의 경우는 갈라진 혓바닥이 쉴 새 없이 날름거리면서 대상(예:들쥐)의 미세한 온도 변화를 잡아내는 바, 이제 이것은 먹이다 하여 아무리 죽은 척을 해도 잡아먹히는 것입니다. 뱀의 지혜란 말이 어울리는 행태로다, 그리고 두뇌활동을 하는 몇몇 부류의 동물들은 영물(靈物)이라 불리기도 합니다.

마무리 합니다. 깨달음이란 것은 두뇌 속에 학습, 저장된 고정관념, 선입견과 편견을 (걸레질하듯 지워 ) 없애는 것입니다. 도를 '닦는다' 란 말이 그래서 나온 것입니다. 무엇을 닦느냐? 고정관념, 선입견, 편견을 닦아낸다... 그리하여 지금 문제 대상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가능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삼법인(三法印)' 중의 제법무아(諸法無我; 존재 영역) 와 제행무상(諸行無常, 느낌 영역)입니다. 모든 대상은 스스로만의 절대가치(=常)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므로, 내가 마음을 돌려 다른 사고의 지평을 얻는다면 대상(의 고통)은 사라질 수 있으리로다, 이 말씀은 뭐냐? 내가 세 살 어릴 적부터 학습해서 두뇌에 저장해 둔 모든 지식과 경험, 정보 등과의 이별을 뜻합니다. 물론, 일시적, 방편 상의 이별이다, 만약, 영원한 이별을 생각한다면 이승의 삶을 작별하는 것이니 이는 본말이 전도(顚倒) 된 것이요, 안될 일이다. 그래서 '배(舟, 깨달음/방편)는 강을 건너고 나면 버려야 한다'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이 경지를 얻으려면, '과거의 나를 버리지 않고 그냥으로는 절대로 불가능' 합니다. 반드시 '나(自我)를 버려서 죽음을 맛보는 경험'을 해야만 한다. 힘들어도 빠르고 확실한 방법은 돈에 대한 의존과 집착을 끊어내는 것입니다. 신줏단지 같은 내 재산, 그리고 내 가족에 대한 애착(愛着)을 뭉텅이로 도려내는 것입니다. 과연 이처럼 어려운 일을 감당할 사람이 몇 명이나 되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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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성경 말씀은 본문과 동일한 것입니다. 【 마태복음 13:14  & 사도행전 28: 26 ~ 27 동일문구 】 You will be ever hearing but never understanding; you will be seeing but never perceiving. For this people's heart has become calloused; they hardly hear with their ears, and they have closed their eyes. Otherwise, they might see with their eyes, hear with their ears, understand with their hearts and turn, and I would heal them.

[해석] 너희는 들을지언정 이해하지 못하고, 볼지언정 인식하지 못하는도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마음은 이미 '고정관념'으로 굳어져 버렸기 때문이니라. 만약, 그들의 눈이 제대로 보고, 귀로는 제대로 듣고, 마음으로 이해하고 돌아설 수만 있다면, 나는 그들의 고통을 낫게 하리라.

​대상이나 닥친 상황을 두뇌에서 일일이 해석해 주는 것은 고맙고 은혜로운 일이지만 때로는 과도하거나 잘못된 해석을 합니다. 그중 하나가 '귀신 현상'으로서, 두뇌에서는 '내가 실제로 (귀신을) 봤다'라는 상황을 만들어냅니다. '이것은 실제다'라는 생각이 들어야 한다, 그래야 으슥하고 위험한 곳에서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만사 제쳐놓고 도망침으로써 (목숨의) 위태로움을 모면하게 된다, 자다가 가위에 눌리는 일도 마찬가지다; 팔, 다리가 눌려있거나 어쨌든 불편(또는 위태) 한 상태에 놓인 것을 두뇌에서는 '내버려둬선 안된다'하여 깨우는 처방을 만듭니다. 이제 소스라치게 무서운 꿈을 꾸면서 나는 깨어나고, 불편해진 내 몸을 추스릅니다. 이때, 팔 혹은 다리가 '저리다'는 것도 알아챕니다. 두뇌는 상상임신도 한다. 또, 약효가 없는 위약(僞藥, 밀가루 등)을 의사가 주고 환자의 병이 낫는 것을 보고 '플라세보효과(placebo effect)'라고 합니다. 공황장애/공황발작은 극심한 스트레스와 불안 탓에 두뇌가 과하게 반응하면서 공격/도피 호르몬(노르에피네프린/ 아드레날린, 즉 부신호르몬)을 방출케 한 탓입니다. 그 호르몬 기운이 체내에서 사그라지는 십여 분만 지나면 공포/발작 증상은 저절로 가라앉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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