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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 강의...이 점을 주의해야 (수정)

참 나 2018. 10. 30. 14:57
최근 도올의 노자 강의 동영상을 보았습니다. 
도올 선생은 이미 불교강의 또는 노자강의를 통해서, 좀 안다하는 사람들로 부터 아픈 지적을
받고 있습니다. 
'도올 선생은 불교는 잘 모른다' 라는 촌평서 부터, 구르미(이경숙)의 '노자를 웃긴 사나이' 까지... 
물론, 도올선생이 지식은 많지요. 많은 양의 독서, 고증, 현장답사를 바탕으로 해서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습니다.   
1.
'많은 지식'이란 것은, 도(道)를 닦는 입장에서는 상극(相剋)입니다.
지식과 도(道)는 절대로 양립할 수 없다.  道란 기존(틀에 박힌) 지식으로서가 아닌, '놀라움의 체험'을
통해 깨닫는 일입니다.
 (爲學日益 爲道日損: 학문을 하면 나날이 지식이 늘어나지만, 道를하면 나날이 준다, 老子) 
道를 닦는 일은, 성경에도 나와 있듯이 그 初入에서부터
 '죽음을 맛봐야 하는' 일입니다.
('taste of death'...自我의 죽음, 속세의 것을 버림)'  
道를 '닦는다'라고 한 것은, 돈과 명예, 권력과 지식에의 의존을 '닦아 지워낸다' 는 뜻입니다,  
 남들이 생각하는 방식과도 다르다. 남들처럼 정해진 틀(색안경,잣대기)에 의존해서는 
결코 세상을 새롭게 볼 수 없다, 라서, 道를 하면 할수록 지식(=선입견,고정관념,색안경) 에의 의존이 줄어 들 수 밖에 없다.

여기서 '세상을 제대로, 새롭게 본다'라는 말은, '판 밖의 공부'란 뜻이다,  즉,

a. 대상을 선입견 없이, 있는 그대로 본다,
                                   b.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는 속담과 같은 偶然한, 奇蹟같은, 神奇한,
玄妙不測한, 波動的, 비과학, 비상식적인 현상 들에 익숙해 지는 것을 말합니다. 무시해 버렸던 일이다,  
그것은 '신기한 체험'을 내가 잘 받아들이기(=解釋, 感受性 開發) 때문이다, 
'합리적인 지식인'들이 어찌 이런 얘기를 수용할 수 있으리오? 

 '지식'은 선입견, 편견, 고정관념이다, 세상을 대하는 정해진 방식, 딱딱한 갑옷이다,

배워서 그렇게 알고있고, 확인되고 공인된 방식과 틀...로 대하기 때문에, 결코 다른 측면을 볼 수 없다, 
책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말과 글, 단어 따위가 다 고정관념이다, 
 '가' 의 정의(定義,definition)는 '가'다,  그렇게 사고와 개념이 굳어버린다,  '나쁜 놈'은 나쁜 놈일 뿐, 하여,
다른 방식으로는 볼 수 없다, 원인과 결과를 생각하고, 돌려서 생각하고, 입장 바꿔 생각할 여지가 없다,
세상만사 마음 먹기 나름이고, 생각하기 나름인데 그런 것도 안된다,  그처럼, '기존의 지식'이란 것은 도를 닦는 사람이 
제일 먼저 집어쳐야 하는 것이다, 도(道)에서 말하는 '난 몰라...'와도 상반된다, 
이치 밖의 이치, 신묘한 현상...들이 다 무시(無視)되어 버립니다.   

당대 최고의 지식인 도올, 이어령 선생 같은 분들은 도(道)를 말할래야 말할 수 없는 모순적 한계를
갖고 있다. 
(자가당착이다)  도올은 자신의 그 지식을 버려야 비로소 '도'를 알게 됩니다, 
도올한테 '道를 알기 위해서 갖고있는 지식을 다 버릴 수 있느냐?' 하고 묻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차라리 날 죽여라" 그럴겁니다. 지식을 뺀 도올이란 시체(=죽음을 맛 봄)다, 무장해제다, 그의 존재감은 사라진다, 
물론, 도올이 그렇게 자아(自我)를 죽이고 용케 득도(得道)한 다음에 다시 전처럼 활동한다면, 그는 성인(聖人)반열에도 
오를 수 있을겁니다만, 암튼, 한 번은 다 버리고 피안 (彼岸, 죽음을 맛 봄; 마태16:28,마가 9:1,누가 9:27) 을 
갔다 와야만 비로소 道를 말할 수 있다,    
 
2.  
도올은 노자 강의 동영상에서 유무,전후,고저,경중...따위를 설명하면서, 있는 것이 없는 것이요, 앞이
변해서 뒤가 되고,
낮은 것이 변해서 높은 것이 된다...운운하며 스스로를 기만하면서 지리멸렬한 글자 풀이를 하고 있습니다.  
런 설명은 들을 가치가 없다,  끄트머리에라도 그런 엉터리 말을 해서는 안됩니다. 

유무,전후,고저,경중...으로 전달하려는 노자의 메시지는 불가(佛家)에서의 '연기(緣起)'인 것입니다.  즉,
有(있음)는 無(없음)라고 하는 몸뚱아리에 걸친 옷과 같다, 그 반대도 같은 즉, 無란 有의 몸뚱아리에 걸친 옷이다,
앞(前)은 뒤(後)라는 몸뚱아리에 걸친 옷이다, 그 반대로, 뒤는 앞이라는 몸뚱아리에 걸친 옷이다, (이하 생략) 
이런 말이 무슨 뜻인가 하면, 
몸뚱아리가 없다면 옷(이란 '가치', 존재감)도 없다, 몸뚱아리와 옷(의 가치)은 한 세트로서 존재한다, 
둘은 한 세트가 되어 서로의 존재감을 만들어 낸다! (=相補性, 가치를 살린다; 객관적 실체와는 별개로, 그것의 '가치부분(色)'을 말함), 
옷이 없다면, 벌거벗은 몸뚱아리는 꼼짝없이 암껏도 못한다(=존재가치 없음).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좋다와 싫다가 그렇게 한 세트요, 잘남과 못남이 한 세트다, 
사랑과 미움이 한 세트이며, 천사와 악마가 한 세트다, 
바로 이 대목에서 '자비', '사랑' 이란 위대한 사상이 나온 것입니다.  
반대되는 것들은 없애버려야 할 것이 아니요, 서로가 서로에게 존재가치를 만들어 준다,  

【참고】'상반된 것은 상보적인 것이다' (Contradictory is complementary, Niels Bohr 닐스 보어), 
세계적인 서양의 원자핵 물리학자가 '연기(緣起)'를 말했습니다. 상반되지만 같이 있음으로서 서로의 존재를 만들어 주는 것!
이것은, 음과 양(陰,陽)이 대표격입니다. 위에 예로 든 '몸뚱아리와 옷' 은 이해를 돕고자 한 비유임,  

도올은 언뜻 언뜻 그와 비슷한 설명을 하긴 해도, 위에 지적한 것과 같은 삼천포로 빠지는 설명을
곁드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가 道(와 宗敎)를 모른채 강의를 한다는 증거입니다.  (본인도 "...체계화된 見解를 갖고 있지는 않다, 단지 
같이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라고 말하더군요. '종교란 무엇인가?' 講義 동영상에서)
'화려하다'란 것은 이미 그 화려하다는 가치관념, 경계에 갇힌(굳어버린) 것입니다.
사람들은 도올, 법륜스님 등이 '道'에 대해서 횡설수설해도 그걸 알아차릴 수가 없습니다. 

장님이 장님을 이끄는 격이다, 그래서 지적을 하는 것입니다.

※도덕경. 81장

"신언불미 미언불신 지자불박 박자부지"

→ 믿음이 있는 말은 아름답지 않고, 아름다운 말은 믿음이 없다,

아는 자는 박식하지 않고, 박식한 자는 알지 못한다,

(세상)모든 걸 다 아는 듯이 말을 하거나, 또는 아주 그럴 듯하게 들리는 말 등은 모두 다

꾸며대는 짓이니, 그렇게 화려하게 보이는 것은 '화려함'이라는 경계(틀)에 이미 갇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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