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제행무상, 제법무아

참 나 2023. 9. 9.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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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법인(三法印, three marks of existence; 제행무상, 제법무아, 열반적정)이란 것, 일체개고를 넣어서 사법인(四法印). 인터넷에서는 뭐라고들 하였을까 살펴본즉, 대부분 변죽만 울리던가 아니면 '제행이나 제법이나 같은 뜻' 운운하였더라. 구체적인 예를 들어 설명하면 알기 쉬웠을 텐데; 행(行)은 이것이고 법(法)은 저것이다 라는 딱 부러진 말이 없다, 기껏 '마음 작용'이라고라? 세상에 마음 작용 아닌 것이 어디 있으랴? 이것을 행(行)이라 하고, 저것은 법(法)이라고 한다는 식으로 적시(摘示) 하지를 못하였더라, 그러하니, 행(行)과 법(法), 무상(無常)과 무아(無我)를 몰라서 답답하였으렷다,

전문 용어인데, 해당 전문가(=깨달은 이)는 없고, 세상에는 온통 아마추어들 뿐이로다. 말하는 이도 횡설수설, 듣는 이는 더욱 모른다. 서로들 어렵다고만 한다. 직역하자면, 모든 행(諸行)이란 다 변하는 것(=무상), 그리고 모든 법(諸法)은 자신만의 절대적 위상(位相)이 있는 것이 아니다(=무아)란 뜻인데, 이하 아래에서 예(例)를 들어서 설명합니다.

​​행(行)이란, 반야심경에서 '색수상식' 중에서의 행(行)이로다; 보고(色), 감지하고(受), 생각하고(想), 반응하고(行), 알아채는(識) 그 오온(五蘊) 속에서 낙처를 찾을 수 있다, (나건 남이건) 감정으로 반응하는 모든 것(行: 희,로, 애, 락/구, 애, 오, 욕)은 변하는 것, 변할 수 있는 것이로다(=諸行無常)이다. 즉,

솔로몬 왕자가 제안하여 아버지 다윗 왕의 반지에 새겨넣은, '이 또한 지나가리라' (위키피디아; And this too shall pass away 또는 This too shall pass)는 '제행무상'의 예(例)다. 또, 인생무상(人生無常)이라 했듯이 인생살이는 한결같지가 않고 영원하지도 않다, 느닷없는 변화를 맞이하니 허무한 것이다(=無常), ​삶이란 크고 작은 파도가 쳤다가 사라지는 것과도 같다, 모든 것은 때가 되어야 이루어지며 계획한 대로 진행되지도 않는다, 우리는 정해진 시간에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제행무상'은 상식적인 말이며 굳이 '깨달음'이 아니어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잊고들 삽니다. 즉, 돈을 벌었다, 좋은 직장을 얻었다, 좋은 집을 샀다...면 그것이 마치 영원히 갈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이로다(=無常), ​​사람 마음은 간사하며, '똥누러 갈 때 마음 다르고 똥누고 나서의 마음이 다르다'. 마음이나 생각은 늘 변한다, '죽을 때까지 같이 가는 친구란 없다', '립스틱 짙게 바르고'의 노랫말은 또 어떠한가? '사랑이란 길지가 않더라 영원하지도 않더라. 그와 반대로, 그동안 신산(辛酸)했던 삶은 어느 순간 펴지는 법이다, '인생무상'이란 말은 사람은 영원히 (잘)사는 것도 아니고, 영원히 못사는 것도 아니로다.

그다음, '제법무아(諸法無我)'는 무슨 말인가? 이는 '깨달음'을 얻어야 비로소 설명이나 이해를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세상 모든 것(=諸法)은 자신만의 절대가치로 존재(=인식)하는 것이 아니로다(=無我). 법(法)이라는 말은 반야심경에 나오듯이, 시제법공상(是諸法空相; 모든 게 空하다는 例)이라;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낳고 스러짐, 더럽고 깨끗함, 늘고 줄어듦); 이 세 가지의 예를 들어 법(法)을 설명합니다.

세상 모든 것(=諸法); 이 말은 대상/사물의 실체(=있는 그대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 부여된 '의미(=가치)'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놓치기 때문에 모조리 삼천포로 빠져 버리는 것입니다. 부연하면, 있다(=色) 혹은 없다(=空) 라고 할 때, 대상/사물의 존재나 부존재를 말한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의 '절대가치'가 있냐, 없냐의 얘기였도다! 이러하니 과연 불법은 심법(心法)이로다.

- 생김(生)의 기쁨/환희란 것은 스러없어짐(滅)의 슬픔/허무와 상보관계(=불생불멸)요

- 더러움의 추(醜,나쁨)함은 깨끗함의 좋음과 상보관계(=불구부정)인 것이다,

- 늘어남(增)의 즐거움이란 것은 줄어듬(減)의 상실감(불안/아픔)과 상보관계(=부증불감)로다.

a.​생(=生의 기쁨)이란 그 자체만으로 '절대가치'를 갖는 것이 아니라, 멸(滅)함의 허무함이 있기에 대비적으로 그 가치가 돋보이는 도다.  b.더러움과 못났음의 (나쁜)가치는 그 반대쪽인 깨끗함, 잘났음의 (좋은)가치와 상보적인 관계로 배척당하는 것이다(억울하지만). 이처럼, 서로 상반된 가치는 그 자리를 바꿔 놓아도 진리가 성립(=상보성)되니 역도진(逆도眞)이다; 난문 중의 난문인 '색즉시공 공즉시색,색불이공 공불이색'이 설명되는 것이다.

​​a. ​죽고 없어짐이 내포하는 슬픔/허무함은, 태어남과 생김(生)이 가져다주는 기쁨/환희에 비추어서 그 슬픔이 더하는 것이며, b. 깨끗함이 좋은 것은 더러움이 불쾌하고 싫기 때문에 더욱 그러한 것이로다; 상반된 두 가치는 자기 반대쪽의 존재감을 더욱 생생하게 만드는 도다. 색상표 상의 보색(補色)이 뭔지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으리라; 빨간색은 초록색과는 보색 관계다. 외과의사의 수술복은 초록색이요, 환자의 피(혈액)는 빨간색이다; 초록색과 빨간색이 선명한 대비를 이뤄서 피가 잘 보이게 한 겁니다. 교통신호등도 보색인 빨강과 초록을 대비시켜 두 색깔을 더 잘 보이게 만들었다; 어느 한 쪽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양 쪽을 다 살리는 것이니 이것이 상생이로다.

​이제 '(해원)상생'도 마찬가지이니, 갑(甲)과 을(乙)은 서로 극단배척하였으나, 이제부터는 반대쪽(의 존재감)도 받아들이면서 살아가야 비로소 을(乙)의 쌓이고 쌓인 원한이 풀리면서 지상선경(地上仙境)이 펼쳐질 터이다; 이것이 증산이 백 년 전에 예시했던 후천 세상 시대정신이로다.

예쁜 사람 곁에 못생긴 사람은 그 상반된 가치로 인하여 (서로의)존재감이 두드러진다. 네가 곁에 있어서 '더 좋아'가 있는가 하면, 너 때문에 '쪽팔려'가 있는 식(式)이다. ​흔한 얘기이건만, 사람들은 이러한 '보편적 진리'를 한 쪽만 선택적으로 좋아합니다. 이를 보고 편벽되다, 편견, 분리 의식이라고 말합니다. 불가의 수행자/선지식들은 이런 설명을 못합니다. 간혹 말은 비스름하게 해도 쉬운 예를 들어 설명하지를 못합니다. 왜 그런가?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했기 때문에(=연기법을 깨닫지 못함) 더 자세히 말을 했다간 이내 알량한 밑천이 드러나고 엉뚱한 말을 하고 말더라...ㅠ

이렇게 ​​제행무상과 제법무아를 설명했습니다. 일체개고(모든 게 고통)나 열반적정(해탈)은 그냥 넘어갑니다. 흔히, 불가에선 입버릇처럼 '실체가 없다', '공(空) 하다'라는 말을 하는데, 이는 무아(無我)를 잘못 설명하는 대표적인 오류입니다. 실체가 없는 것이 아니다, 실체는 늘 있는 것이다. <절대/객관/여여함/산은 산이요 물은 물> 따라서, 실체가 없다란 말은 어불성설이다, 단지, 실체에 부여된 가치(=고정관념과 선입견)는 그 반대 가치와 더불어 존재(=있다)하는 것이로다; 상반된 두 가치 중에서 어느 한 쪽만의 가치란 것은 존재할 수 없고(=無我), 늘 반대 가치가 있음으로써 내 가치도 생생하니 살아나는 것이로다,

서로 상반된 '큰 것'과 '작은 것'을 예로들어 무아(無我)를 더 설명합니다. 큰 것이란, 사람들이 (대체로)좋다고 하는 가치(價値, value)요, 작은 것은 그 반대로다. 전자는 갑(甲), 후자는 을(乙)로 통칭합니다. 이런 관념은 어려서 부터 자연적으로 습득형성된 선입견,고정관념,세상살이 사고방식입니다. 그런데, 만약(!) 작은 것이 사그리 없어진다면 큰 것은 어떻게 자신의 큼(value)을 자랑하고 살 수 있겠는가? 여기의 포인트는 큰 것이 아니라 '으시댐' 이란 쪽에 있습니다. 즉, 큰 것과 으시댄다 라는 것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세상 사람들은 '이 둘은 같은 것'이라 여기며 살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분리되는 순간(!) 우리는 속세의 사고방식을 벗어나므로, 드디어 죽음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큰 것과 으시댄다는 것은 서로 다를 수 있다 라고 생각하는 지점, 여기가 바로 속세에서 깨달음의 문지방(threshold)을 넘는 것이요, 요단강을 건너는 것이고, 차안에서 피안(彼岸)에 이르는 지점입니다(=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여기서, 큰 것 그 자체는 실체요 실존적 존재일 터이니 '산은 산, 물은 물'인 것이다. 즉, 작은 것이 있던 말던 그냥 존재하는 것이다; 그 반면에, '커서 좋다(으시댄다)'라는 것은 실체(=실존적 존재)가 아니다(무아); 즉, 실체에 입혀진 가치(value)부분만을 따로 말한 것인 바, '작은 것'이 있어야만 거기에 비춰보아(=照見,반야심경) 큰 것의 가치가 생겨나면서 우쭐대는 것이다, 그런즉, '작은 것'이 없어진다면, 큰 것은 무엇에 빗대어 우쭐거릴 수 있겠는가? 골목대장은 동네 꼬맹이들이 다 등을 돌리면 어찌 대장노릇을 할 수 있으랴? 이런 것을 가리켜 무아(無我)라 한 것입니다; 흔히 말하는 '나(我)라고 할 것이 없다'...나란 것은, 절대가치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닌 즉, 상반된 것이 있을 때 비로소 나도 빛(色)을 얻는 것이로다!

반대 짝이 있어야 나 또한 빛을 얻는다; 칠판의 어두움은 그 위에 쓴 글자의 드러냄을 위한 것이요, 궂은 날씨가 있어서 맑은 날씨는 칭송을 받는 것이로다, 약함이 있을 때 강함이 자랑을 하는 것이다...왼쪽과 오른쪽도 마찬가지다, 왼쪽이 사라지게 되면 오른쪽은 더 이상 오른쪽이란 말(=가치)을 들을 수 없으니 아무 쪽도 아닌 것(=空, 無我)이 되고 만다. 하여, 반대쪽이 있어야 나도 명색(名色)을 얻는 구나! 이것이 무아(無我)요 정각(正覺)인 것입니다. 연기법(緣起法)이다; 반대편은 척살해 없애는 대상이 아니요, 엄연히 서로가 서로에게 '존재감의 빚*' 을 지고 있으니 껴안는 것(=긍휼히 여김)이 마땅하고 당연하다, 이것이 해원상생,사랑,자비의 깊은 뜻이로다. 모든 종교와 진리의 시원(始源)이자 귀착점(歸着點)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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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여기 쓴 내용을 온전히 이해하고, 또 자신의 언어로 살을 붙여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반야심경'을 수미일관(首尾一貫)하게 술술 설명할 수 있을 겁니다. 마땅히 예수나 석가모니와 같은 반열일 터. 불가(佛家)의 큰스님, 선지식이라 한들 어찌 이 일을 감당할 수 있으리오?

​'후천 세상에선 1만2천의 도통군자가 나온다'. 이는 앞으로 많은 이들이 깨달음을 얻게 되리라 는 얘기인데, 여기 블로그의 글로 깨달으면 됩니다. 세속과 영합하였으니, 제도권의 종교(기독교,불교 등)는 없는 것과 같으며, 깨달음(=도통)은 불가능합니다. 세속은 악다구니,광기,환상과 함께 욕망(慾望)의 확대재생산으로 금수(禽獸)의 삶이로다; 금문교로 유명한 샌프란시스코의 도심(downtown)은 마약,노숙인,절도,강도로 치안이 붕괴되었고, 독일은 수 십 년 전부터 (독일)병에 걸려 신음 중이며, 유럽 여러나라는'박물관'이란 오명이 붙었습니다. 가정, 교육계, 종교계, 정치판...모두 다 망가져 버렸다, 항차 어디서 1만2천의 도통군자가 나올 것인가? 하늘에서 떨어질 것인가? 이 블로그를 보고, 많은 이들이 깨달음(도통)을 얻고 앞장 서 인류를 제도해 나가시라.

본문에, 상반된 것(제법)은 서로가 서로에게 '존재감의 빚을 지고 있다' 라고 하였습니다. 존재 vs. 존재감, 이 양자의 차이를 아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깨달음은 그 차이를 식별해 낼 수 있는가 에 달려있다. 존재는 실체요 절대계이므로 변하지 않는 대상이다(=常數), 반면에 존재감은 그 존재(실체)를 대하는 내 마음인 즉, 고정관념과 선입견이로다(=變數). 깨달음이란, 결코 존재(실체)와의 씨름이 아니다, 그럼 뭐냐? 그 존재에 따라붙어서 (우리가)해석하고 인식하는 마음(心)과의 씨름이다. 세상 모든 존재(=실체)는 바뀔 수 없는 것(=常數)이지만, 그것을 대하는 내 마음(=선입견, 고정관념, 편견)은 바뀔 수 있는 것(=變數)이로다! 노자 도덕경의 첫문장;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이름들이 의미하는 바는 그 자체로 절대성을 갖는 것이 아니로다)'이 바로 그 뜻이다, 그렇게 말하는 증거는, 바로 다음 장(2장)에서 예를 든 것, '有無, 長短, 難易,高下...'와 같이 서로 반대되는 것은 상생하는 것일 뿐이다 라고 하였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