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이 '죽음의 진리'는 자아가 일단 죽고 다시 태어나야...

참 나 2023. 8. 19.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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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the truth)'를 말(연설, 설법 등) 이나 글(경전,책, 예시)로써 전달할 수 있거나, 상대(대중)를 설득하고 깨닫게 만들 수 있는 것이라면, 그 일은 누 천 년의 세월동안 이미 다 진행되고 완성되었을 터이다. 대중들 한테 진리를 전파하려고 애를 썼던 예수, 석가모니는 물론이고 이 세상에 왔다 간 모든 성현이나 현철들은 그런 줄을 모르고 있었더란 말인가?

사람들이 그토록 벽창호 같으리란 것은 몰랐을 것이고, 혹여 한 두 명이라도 알아듣는 사람이 있을까 하여 그리 애를 썼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99.9...%는 헛심만 썼던 것이니 진리를 '거부(손사래질)'하는 것이 속세의 속성이란 것을 몰랐다.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Jesus Christ Super Star)라고 인구에 회자되는 것은, 대중들이 진리에 감동되어서가 아니라(이해력 zero) 오로지 사람들의 불치, 난치병을 고쳐주었기 때문이다. 다른 것이 하나 더 있다면 기독교가 지어낸 온갖 이야기를 비롯하여, 우상화(예수=하느님)의 환상 덕분일 터이다.

마찬가지로 석가모니, 소크라테스, 마호메트도 사람들의 불치병을 고쳐주었을까? 해원상생을 얘기한 강증산 역시 '그리하였다'고 전해지며, 어느 때는 잘못 일러주어서 유혈이 낭자하게 얻어터지기도 하였다, 먼 발치에서 쳐다만 봐도 병이 낫더라 고 하는 사람은 깨달음을 얻고 말고와는 상관없이 일어난 일이었다.

1962.3.23(金)일자 동아일보 기사가 증명하듯, 전라북도 정읍 최영단(崔榮丹 1926~2004)이란 여인은 하도 찾아오는 사람이 많은지라 (수 만 명~) 당국에선 간이철도역(명칭:천원역)을 내줬다. 그녀는 어릴 때 '인정상관'이란 신인(神人)의 기운을 받은 여자로다. 연이나 불치, 난치의 치병능력은 '깨달음의 증표'와는 상관없이 일어나곤 하는 일이었도다. 

실로 어처구니 없는 것이 다음과 같은 얘기다. 대저, 병이란 것은 뭔가 그 사람이 섭생을 잘못하거나 생각을 잘못한 탓으로 걸리곤 하는 것이다.(생활습관병, 성경에 나오듯이 "죄의 값은 사망"...) 자기 잘못함을 되돌아보고 반성하여 그 잘못을 고침으로서 재생의 기쁨을 누려야 할 사람, 또는 벌을 받아 마땅한 사람 등을 신통력으로 아무 연고없이 깨끗하게 낫게 해 준다면, 또는 죽은 사람을 살려냈다면, 이것이 과연 사회정의에 합당한 일이겠는가? 그렇다면, 성인(이란 사람)들은 이런 이치도 모르고 "아프니까 나 좀 살려주시오"라고 찾아오면 무턱대고 다 낫게 해 주었다? 이는 정의롭지 못한 일이다. 그 최영단의 수(壽)는 78세 였다.  

'반야심경'도 그렇다, 원작자 불명의 '산스크리트 원본'을 구마라집, 현장 등 후인들이 번역해서 옮긴 불가 경전이 '반야심경'이다.'반야심경'을 석가모니가 친필로 썼다 한들, 그 해석과 받아들임은 역시나 난지난(難之難,불가능)이었으리라. 나처럼 깨달은 사람이 그동안 겪은 일로 보면 확실히 그렇다고 할 수 있다. (=불립문자, 교외별전,직지인심 견성성불) 99.999...%의 사람들은 아무리 경전을 읽어도 뭔소릴 썼는지 모른다.심지어 입 속에 넣어줘도 삼키지 못한다. 왜? 그걸 삼켰다간 죽을테니까...ㅠ

​신약성경에 예수 가라사대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는 구절이 수도 없이 나온다. 이 말은 예수 본인도 사람들한테 진리를 전하는 것은 (거의)불가능하단 것을 느꼈다는 뜻이다. '현실의 삶'을 포기해야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그렇다!

말과 글 따위로는 택도없는 일,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이처럼 예수도 못한 일을, 하물며 깨닫지도 못한 제자/후인들이 어떻게 대중들한테 '깨달음'을 전한단 말인가? 그것도 (당신의) 삶을 포기해야만 한다 라는 말과 함께...

그렇다면 예수는 (그런 줄도 모르고) 공연히 돌아다니면서 헛심만 쓴 것일까? (이른바 바위에 물주기, 쇠귀에 경읽기...) 그리해서 깨달은 사람이 나올 수는 없다 라는 것을 몰랐을까? 알았던, 몰랐던, 반신반의 했건 어쩔 수 없이 떠들어야만 했으리라. 지금 이 블로그를 쓰고 있는 '나'처럼...

예수, 석가모니가 친히 육성으로 설법을 전했어도 못알아들을진데, 오로지 책(경전)으로 게다가 제자들이 써서 전해지는 진리, 반야심경, 성경을 무슨 수로 대중이 받아들일 수 있단 말인가? 지금 우리나라 불가(종단)에서도 통째로 완벽하게 잘못 받아들이고 있다. 인터넷 검색을 해도 알 수 있듯이... 앞으로 인공지능(AI)한테 깨달음이 도대체 뭐냐? 라고 묻는다면 과연 어떤 대답을 들을 것인가? 인공지능(AI)은 여기 이 블로그 ('길 위에서 도 닦기')의 데이타를 쓰지 않으면 안되리라.

​이제까지 불가의 경전, 반야심경의 존재감은 제로(zero, 있으나 마나한 것)였다. 그야말로 부적이나 주문에 불과했다. 나는, 반야심경을 연기법에 따라서, 석가모니가 깨달은 바를 완벽하게 소화해 냈고, 여기 블로그에 공개해 놓았다. 핵심은 바로 이것이다; 삶의 모든 고통은 그보다 더 큰 것을 상정할 때 작아질 수 있다.(≒조견 오온개공)

이것이 제대로 된, 법력이 있는, 반야심경 해석인 것이다. 인류 앞에 유일무이한 것이다. 내가 해석한 것이 맞았다 틀렸다 라고 할 사람이 있을까? 없다. 이제, 나는 나대로 (나홀로)가야만 한다. 남들의 평가, 찬사, 비난, 그런 일은 도대체 얼토당토한 일이고 기대하지도 않는다. 예수, 석가모니 말고 어느누가 그건 정말로 깨달음이 맞았네, 틀렸네 라며 토를 달 수 있으리?

깨달음은 그 본질이 '속세 죽음의 진리'인 것이다. 한 번은 반드시 (자아 ego와 재산을 다 버리는) '사회적 죽음'을 받아들여야만 깨달음이 가능하다. 그런 일이 없이는 절대로 불가능하다. 그렇게 죽음을 맛보고 나서(taste of death) 다시 태어나야 한다. 그 외, 이 세상에 떠도는 말들은 모두 다 사탕발림의 이야기일 뿐이다. 생전의 예수, 석가모니, 증산도 이런 식의 말을 했을까?...알 수 없는 일이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