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길 잃은 종교계(佛家 등)

참 나 2023. 3. 6.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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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깨달음 같은 것은 나는 모른다. 그저 괴로움이 무엇인지 알고..."​

구독자 14만 명에 이르는 유튜브 채널 '법상 스님의 목탁 소리' 운영자의 말이다.무아(無我)에 대한 설명이다.

"뼈나 근육 인체의 장기들은 120일에서 200일이 지나면 세포가 완전히 바뀐다고 한다.

몸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과연 '몸=나'가 맞나?라고 묻는다. 고정된 실체로서 '나'가 없음을 깨달으면

주장하고 집착할 내 뜻이 없어진다" - 조선일보 A18, 2.24일(金) -

스님의 글은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불교, 기독교 등의 모든 종교는 마음(心)을 다스리자는 것이니 비유를 하더라도 물질(법칙)얘기를 하면 안 된다.

물질은 비든 눈이든 벼락이 치든 상관치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객관의 세계'이므로 그러하다.​

그 대신, 물질을 대하는 내 마음(생각방식)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을 얘기해 주는 것이 올바른 '가르침'인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법문이나 성경 말씀에서, 물질얘기가 나오거나 물리법칙에 비유하면 삼천포로 빠지는 길이다.

특히, 스님이나 목회자들은 명심해야 한다.

 

성경의 '오병이어'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빵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로, 하늘을 쳐다보며 감사를 드리고 나서, 5,000여 명이 나눠먹고 남았다 (누가: 9:13~19)

빵 일곱 개(seven loves)와 작은생선 두 마리(two small fish)를 4,000명이 나눠 먹었고, 그 외에 여자와 아이들도

있었다(마태: 15:35~37) 이를 마치 실제 얘기인 양 받아들인다면 이는 혹세무민,우상숭배(=얼굴이나 또는 형체 있는

것을 떠받듬) 로다. 

 

* 사과를 한 입 베어무는 '상상'을 할 때 두뇌의 특정영역은 자극을 받는데, 이것은 실제로 사과를 한 입 먹을 때 활성화되는 영역과

   일치한다. 덴마크 오르후스대 연구팀, 차크 안데르센 박사는 "생각만으로도 생리적인 반응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아무것도 먹지 

   않고도 충분히 만족감을 느낄 수 있다"고 했다.  <조선일보 사이언스 카페 2023.5.24자 황규락 기자>

 

'깨달음'은 마술처럼 물질이 변화하는 그런 기적(奇跡,異蹟)현상을 배척한다. 그런 일은 사람을 유혹, 현혹하는

것이다. 세상을 대하는 (지금까지의) 내 의식이 바뀌고, 이로써 내 삶이 변화하는 것, 그것이 진짜 기적인 것이다.

물질(대상)은 '객관(客觀), 절대의 세계'다. 그 반면, '깨달음'은 물질을 받아들이는 '내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이니,

상대(相對)의 세계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내 마음의 변화 그것 뿐이니, '연기법'은 그 얘기입니다​.

 

좋은 것(=마음)이 있다면 나쁜 것(=마음)이 있기 마련이다,

깨끗해서 좋다고 하면 더러워서 싫다는 마음이 있기 마련이다.

높고 커서 좋다는 것이 있다면, 낮고 작아서 볼품없다는 것이 있기 마련이다,

밝아서 좋다면 어두워서 불편하다는 것이 있는 법이다.

 

* 물질/대상, 상대방 마음은 변하게 할 수 없지만, 그러나 '내 마음은 변하게 할 수 있다(=가변성可變性)'

그런 얘기로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면 이 대목에서 영감(靈感)을 받은 것입니다.

 

'세상을 이처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 사랑, 자비, 상생이다. 곧 예수, 부처, 증산의 가르침이다.

모든 긍정적 대상(긍정가치)은 그 반대되는 부정적 대상(부정가치)이 '있다(是)'라는 뜻이다. 두 상반된 가치 중

에서 한 쪽만의 (분리되어 존재하는)가치란 있을 수 없다. 즉, 오른 쪽과 왼 쪽이 같이 있다가, 왼 쪽이 사라지면,

오른 쪽은 더 이상 '오른 쪽'이 아니다. (=오른 쪽이란 가치는 사라짐. 空)'이 되고 만다. 이것이 '연기법'이다.

 

또, 물질 그 자체(사람 포함)와 거기에 붙어있는 가치(色; 좋다,나쁘다 등)는 '같은 것'이라고 보는 것이 세상사고

방식이지만, a.물질 그 자체와, b.거기에 붙어있는 가치(명색名色)는 별개다 라고 볼 수 있어야 한다 라는 것이

'산은 산, 물은 물'이라는 법문이다. 즉, 한 대상과 그것을 대하는 방식(고정관념,선입견,편견)은 별개의 것이다;

노자(老子) 도덕경의 '명가명비상명(名可名非常名; 사물/대상의 이름이란 것은 편견일 뿐)'은 바로 그 얘기였다.

 

말은 쉬워보이나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따라서, '지금 이런 말들이 뭔 소린지 알아 듣겠다'라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문득 '깨달음'을 얻은 사람입니다.

 

故성철 스님이 '불생불멸'을 E=MC2(질량불변의 법칙)로 설명한 것이나, 법륜스님이 '부증불감'을 '비행기에서

용변을 봤다고 비행기 무게가 줄지 않는다'라고 한 것, 서두에서 몸 세포가 새로 바뀐다 등과 같이, 생물학이나

물리법칙에 비유한 것은 삼천포로 빠진 것인 바 (☞ 반야심경은 생물학, 물리학 현상을 설명하는 것이 아님)

사람들의 고통(마음)을 없애는데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합니다.

 

어디까지나 내 마음방식(의식)을 바꿔잡는 얘기를 해야 한다. 위 법상 스님은 대중과의 대화로 한 말이였지만

잘못 이끄는 것이다. 본인 스스로 '깨달음은 모른다'라고 했듯이 허튼소리인 것입니다.

'무아(無我)도 스님의 그런 설명과는 다른 것이다. 즉, 내 몸, 마음이 없다 라는 것은 터무니없는 얘기다.

무아는 제법무아(諸法無我)이니; 만물 만상은 자기 홀로의 (절대)가치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로다.

(좋은)가치는 그와 반대되는 (나쁜)가치가 있음으로써 비로소 좋게 인식되는 것 뿐이로다,

 

'반야심경'은 세상만물(제법,제행)의 가치를 '색(色)'으로 표현하였는바, 마치 어린애가 어른이 되는 과정에서,

윤곽만 있는 밑그림에 '색칠'을 하며 성장하는 것과 같다. 그리하여 평생토록 그 색깔로서 세상을 기억(=고정관념,

선입견)하는도다. 한 색깔은 자신의 반대 색깔과 대조되어 서로 생생하게 존재하는 것이니, 이를 일컬어 상보성

(相輔性)이라 하는 것입니다. 'Contraria sunt complementa' (Contradictory is complementary, 상반

(相反)된 것은 상보적인 것이다. 陰陽). '좋은 것'은 '나쁜 것'이 있는 덕분에, 역(逆)으로, 나쁜 것은 좋은 것이

있기 때문에, 그러한 자리매김(가치)을 받는 것이다. 그리하여, 한 쪽이 사라지면 그 반대 쪽도 사라지니, 이것이

연기법이요, 상보성, 무아(無我)입니다.

 

모두 다 '좋은 것'만 있다면 그 중 어느 것도 '좋다'는 평가를 받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모두 나쁜 것만 있다면

그 중 어느 것도 '나쁘다'란 평가를 받지 아니한다. 이처럼, 무언가 가치판단을 하려면 그 반대 것에 비춰 보아야

(=반야심경에서의 '照見')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부자(의 행복)는 옆에 가난함(의 불편함)이 있기에 그와 비교되니(=照見)좋다고 하는 것이고, 잘생겼다는 우쭐함은

그 옆(반대편)에 못생겼다 라는 슬픔과 더불어 존재하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반대되는 것은 '생생함의 원천'이로다.

세상만사(諸法,諸行 색수상행식)가 다 그러하다. 따라서, 이제부터는 '세상의 모든 부정적인 것'에 그 합당한 자리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 해원상생(解寃相生;이제껏 받은 푸대접의 한恨을 풀어서 더불어 같이 삶) 이다.

이것이 또한, 부처님의 자비(慈悲), 예수의 사랑(the supreme love)이니, 모두 다 같은 말씀이고 가르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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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반야심경'에서 시제법공상(是諸法空相, 만물이 空하다 라는 것의 例)이라 해서, 세 가지 예를 든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이란 것이 어떤 물질적 대상(또는 현상)을 설명한 것이 아니란 점은 분명하고, 또한 부처님의 말씀이라면

반드시 그러하였으리라. 따라서, 지금까지의 그릇된 해석, 즉,

 

- (불생불멸) 낳는 것도 아니고 죽는 것도 아니다...?

- (불구부정) 더러운 것도 아니고 깨끗한 것도 아니다...?

- (부증불감) 늘어나는 것도 아니고 줄어드는 것도 아니다...?

이런 해석은 a.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고 b. 뭔가 '물질/물리 현상'을 설명하고 있으니 빗나간 것이 틀림없고,

c. '연기법' 설명은 고사하고 그 근처에도 가지 못한 것입니다. 즉, '그 반대도 또한 마찬가지다'라는 역도진(逆도眞)이

성립하지 않습니다(역도진: 색즉시공 공즉시색). 결론적으로, 기존 반야심경 해석은 완전히 길을 잃었다는 것입니다.

* 구마라집(AD344~413,Naver지식백과)에 이어서 현장(玄奬,602~664)이 산스크리트어 원문을 한문으로 번역한

'반야심경'이 천 수백 년 동안 사람들에게 잘못 전해져서 한낱 부적과 주문따위로 받아 들여진 것을 이제 비로소

제가 바로잡아 여기에 밝혀놓았습니다. 당초 두 분의 '한문번역'은 완전한 것이었을까 라는 의구심은 여전히 유효한데,

이를 어느 누가 감히 지적하리오? 오직 깨달음을 얻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얘기입니다(☞不立文字,敎外別傳)

※ '도일체고액'...이 문구는 산스크리트어 원본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라는 것이 '영문번역본'을 통하여 드러났음.

 

'반야심경'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핵심사상인 '연기법' 입니다. 따라서, 연기법 해설 외에는 그 어떤 물질, 물리법칙을

이용한 해설도 자의적(恣意的,제멋대로) 이고 틀린 것이며; 그 내용이 없음은 물론, 문장으로 성립조차 되지도 않는

어불성설(語不成說)이었다. 깨달음(正覺)을 얻어 활연관통한 제가, 반야심경을 완전히 새롭고 쉽게 풀이했으니,

이는 석가모니 말씀의 재림(在臨)이요, 인류(종교)사의 대사건(大事件)인 것입니다.

 

깨달음은 심법(心法)이니 내 마음 얘기를 해야합니다. 물리(물질)법칙을 말하면 안 되는(=아닌) 것이다.

따라서,​'불생불멸'은...태어나서 '좋다'는 것이 없다면, 죽고 없어져서 '싫다'는 것도 없다,

'불구부정'은...더러워서 '싫다'는 것이 없다면, 깨끗해서 '좋다'는 것도 없다,

'부증불감'은...(재산따위) 늘어나서 '좋다'는 것이 없다면, 그것이 줄어들어 '싫다/괴롭다'는 것도 없다.

 

이로써, 반야심경이 말하는 생(生)노(老)병(病)사(死)를 비롯, 모든 것들이 '다 없다'라고 한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있습니다. 즉, '생노병사...'란게 실제로 '없다'라는 식의 황당한 얘기를 한 것이 아니라, 그 '생노병사...'를

받아들이는 내 '마음-의식'이 바뀐다 또는 사라진다 라는 뜻이었습니다.

 

이제, 그러한 초월, 해탈의 경지는 더 이상 '속세의 것'이 아니다, 하여, '아제아제바라아제...'(가세 가세 저 江

건너 彼岸으로 가세), 성경에서는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이로써 나는, 사람들이 배를

타고 '속세의 강'을 건너는 배의 도사공(都沙工)이로다.

 

길 잃은 불가는 연기법의 낙처를 얻지 못하여 그 설명이 지리멸렬합니다. 저의 반야심경 해설은 '역도 진'

(逆도眞; 색즉시공 공즉시색, 색불이공 공불이색)이 성립한다는 점에서, 부처님의 연기법이 맞는 것입니다.

※ 색(色)은 세상만물(제법,제행)에 붙어있는 '긍정적 가치', 공(空)은 그와 상반되는 '부정적 가치' 입니다. 끝.

 

여러차례 가필로 이제 거의 글이 되었습니다. (2023.3.10일 현재). 모든 창작활동이 그렇듯이 글짓기를 하건

집짓기를 하건 완성이 있을 수 없고, 쓰고나서 보면 고치고 보완할 곳이 계속 나타납니다. 그저 계속할 따름이니...

서두에 인용한 '법상 스님'의 글이 계기가 되어서 이런 글이 나오게 되었으니, 이는 그 스님의 덕(德)입니다.

또, 성철, 법륜 스님 얘기도 두 분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설법(강의)중에서 잘못된 부분을 지적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