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물질 그 자체가 아니라, 내 마음을 돌려잡아라!

참 나 2023. 2. 10. 14:35

 

 

I.

 

이 「블로그」를 개셜한지 이십 년이 되었습니다. 독자분들과 도(道)와의 인연(因緣)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몇 년 전 Naver 블로그를 새로 만들어 '같은 글'을 올리고 있는데, 방문자수는 적고 기복이 큽니다. 

블로그에 새 글이 없어도 방문자수가 0이 되지 않고 2~30명이 유지된다는 것은 고정독자분들이 있다는 얘기지요.

방문자수가 여러날 계속 0이라면 블로그는 그만둬야 겠지만, Naver블로그 쪽의 사정을 볼라치면 그런 일은

없을 듯 합니다. 역시 내가 하기 나름이다,   

이런 글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을 도판에서는 '인연자'라고 합니다. 도반(道伴)이란 뜻이지요.

다음 글은 '평생 전도자의 삶을 살았다'라는 다석 유영모(1890~1981; 씨알 함석헌(1901~1989)의 스승)옹이

한사코 진리를 전파하려고 애썼던 삶의 모습입니다. 당시 이런 블로그가 있었으면 좀 덜 고생했을겁니다. 

(전략)"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지를 푸는 것이다. 풀어지는 대로 종이에 적고는 YMCA 강의실에 나가

몇 시간이고 설명했다. 너무도 엉뚱한 소리라 듣는 사람이 몇 안 되었다. 어떤 때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중략)

유영모 선생은 그 YMCA에서도 쫓겨났다. 그리고는 이집 저집을 헤매고 다녔다. 나중에는 자기 집에서

사람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한 사람이라도 찾아오면 몇 시간이고 말씀을 퍼부었다"

- 다석 유영모의 동양사상과 신학, p.29, 김흥호, 이정배 편, 솔 2002-

 

석가의 생각과 예수의 생각은 같아요. 이 세계를 부정하는 거예요. 이 세계를 부정하지 않으면 불교도 기독교도 아니에요.

- 전게서. p.106 -

속세에서 진리(眞理)가 대접받는 모습은 언제나 참담합니다. 진리는 세상살이의 반대편에 서 있음으로,

세상살이와는 마치 물과 기름이다. 여기 블로그의 글들이 그렇고, 예수나 석가모니의 삶도 마찬가지였다.

불치병이나 불구를 고쳐주는 기적의 방편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을 뿐, 말씀은 언제나 먹통이었고, 바위에다

물 주는 격이었다 하여, "알아먹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한 말씀이 성경에 나옵니다.

헛소리 말라며 몽둥이를 들고 들이닥치거나, 예수나 소크라테스가 당했듯이 기존질서와 사회규범을

어지럽힌다고 하여 십자가 처형이나 독배(毒盃)를 들지 않았다면 다행이리라.

II.

 

1. '하나님'이란 것은, 모든 생명체 의식(意識)의 교집합(交集合)이다. 이 말은 제가 처음 한 말입니다.

2. 일상의 '걱정거리'는 그 보다 더 큰 걱정 앞에서는 힘을 잃고만다. 따라서, 더 큰 걱정을 상정(想定)할 수 있다면

작은 걱정은 사라집니다. 이는, 연기법과도 통하는 말이며, 걱정을 없애는 테크닉인데, 제가 처음 한 말입니다.

우리가 습관적으로 하는 모든 걱정거리는 사실은 그대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통계적으로)알고 있지만,

사람들은 그 걱정거리를 굳이 끌어안고 힘들어합니다. 오죽하면, '걱정도 팔자'라는 말까지 합니다.

괜한 걱정을 하며 사는 세상 사람들의 모습은 얼마나 불합리한가? 그렇게 살기보다는 차라리 더 큰 걱정거리를

떠올려서 그 넘을 상쇄, 소멸시켜보라!  예를들면, 과거의 죽을 뻔한 사고경험, 암(癌)이었을 수도 있는 신체증상들,

아찔했던 순간들, 지인이나 친구의 죽음을 떠올릴 수도 있다. 각자의 경험 속에서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생각을 돌리고, 더 크게함으로서('그만하길 다행이야') 걱정이 사라진다면, 이 보다 더 큰 복음(福音)이 어디있으랴?

 III.​

 

팔만대장경을 압축한 것이 반야심경, 그 반야심경을 다시 한 글자로 압축하면 심(心)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이라고 한 구절을 보고, 우리들 눈에 보이는 것으로서의

태어남과 죽음, 더러움과 깨끗함, 늘어남과 줄어듬 인양 받아들인다면 이는 삼천포로 빠진 것이다,

반야심경의 불생불멸(不生不滅)을 '에너지 불변, 등가원리, E=MC2' 라고 설명하는 (故)성철스님을 비롯하여

불가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어림짐작을 하고 있습니다.

(바른 뜻은, '태어남의 기쁨이 없다면 소멸함의 슬픔도 없다'...연기법 얘기입니다. 제가 처음 해석해 냈습니다)

물질을 대상으로 하거나, 물리법칙을 떠올리는 방식으로는 '반야심경'이 도대체 뭔 소릴 한 건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로써 어떠한 소득도 없으며, 그런걸 보고 '진리의 정화(精華)요' 라고 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럼 뭣이란 말인가?

반야심경은, 물질이나 물리법칙 그런 얘기가 아니라, 대상을 받아들이는 내 마음방식(가치판단)을 말한 것이다,

화엄경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가 그 말이며, 원효의 '해골바가지 물'의 예화(豫話)가 바로 그 말씀입니다. 

 

낳음과 죽음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낳음과 죽음을 대하는 가치판단의 얘기다,

즉, 생(生)겨서 좋다, 사라져서(滅) 나쁘다 라고 하는 내 마음의 움직임(일렁임), 거기가 낙처(落處)인 것이다.

'받아들이는 마음의 문제'이기 때문에, 생노병사가 없다, 뭣도 없고, 뭣도 없다 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받아들이는 내 마음의 문제, 이게 아니면 반야심경은 (지금까지 처럼) 단 한 구절도 이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좋은 것이 없다면 나쁠 것도 없다, 마찬가지로, 나쁜 것이 없다면 좋을 것도 없다'

 

이처럼 역(逆)도 진(眞)이다, 반야심경은 바로 이런 말씀이었다 (=色卽是空 空卽是色, 色不異空 空不異色)

이로써, 이 깨달음의 기운이 불가(佛家)는 물론 온 천하에 커다란 파장을 불러일으킬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