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고통을 극복하는 테크닉 (진리)

참 나 2022. 12. 21.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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序文

인류상 몇 몇 성인(聖人)을 제외하면, 진리를 알고 전하는 사람이 없었고 그런 상태로 사람들은 주욱 살아왔다.

진리는 '삶에서의 원동력'은 고사하고 별 역할을 하지도 못하였다. 오늘날 종교인 중에도 깨달은 사람은 없다.

지금 내가 진리를 설법한들 그걸 제대로 알아들을 사람이 도대체 몇 명이나 있을까?

앞으로도 우리 인류는 이처럼 계속 진리와는 담을 쌓고도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그럴 리가 없다.

 

사람들은 '한 차원 높은 삶'을 위해서, 지식(知識)과 지혜(智慧)가 늘어나면서, 영성(靈性)을 배우려 할 것이다.

자신의 무지몽매함을 그대로 내버려둘 리가 없다. 지금까지는 삶의 여유가 없었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이젠, 먹고 산다는 그 문제, 강팍함이 수그러들면서 '알아듣는 귀'가 많이 나올 것이다. 께달음까지는 어렵더라도,

이는 인류의 마지막 남은 미개척 교양, 영성찾기 판이로다. 지구상 생명체가 다 같이 누리는 삶으로서의 영성,

이 중요한 영성분야를 인류가 모른채 내버려 둘 리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인류는 '영성의 시대'를 맞이했고, 마땅한 시기가 도래(到來, 훔리치야都來)한 것이다.

 

本文

어려운 '진리'는 한 켠에 모셔두되, 조금이라도 알아들을 수 있는 얘기를 해야한다 라는 게 저의 목적입니다.

다음에 설명하는 내용이, 피차간에 얼마나 어려운 것이었으면, 그것이 '종교'가 되고 '믿음'이 되어야만 했으리?

 

반야심경 서두에 있듯이, 관세음보살은 '조견 오온개공 도일체고액'이라 하여, '비춰보니 내가 인식하는 모든 일은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마음작용일 뿐이란 것을 깨닫고 비로소 삶의 모든 고통으로 부터 벗어났다" 라고

설(說)하였습니다. 이게 도대체 뭔 말씀일까?

 

1. 색즉시공 공즉시색;

'가치가 있다'라고 하는 것은 '가치가 없다'라고 하는 것이 곁에 있는 덕분이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니(=역도진),

'가치가 없다'라고 하는 것(=없어 보이는 것)'은 '가치가 있다'라고 하는 것이 곁에 있기 때문이다,

* 곁 이란, 바로 옆이란 말이 아니라, '내 머릿 속 내지 잠재의식'에 자리잡고 있다 란 뜻(=고정관념,선입견,편견)

 

2. 색불이공 공불이색;

한 가치는 그 반대가치가 있음으로 인하여 (그 덕분에)존재감이 생긴 것이다; 따라서, 가치있는 것과 가치없는 것은

서로 별개의 것(=분리되어 홀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한 쪽(가치)이 없다면 다른 쪽(가치)도 즉시 사라지므로;

양자는 '서로의 존재가치를 더욱 뚜렷하게 만들어 주는 것(=相生)'이로다.

 

■ '두 빗자루'의 예:

'두 빗자루가 서로 등을 대고 서 있는 형국'이란 비유는, 한 빗자루가 없어지면 즉시 나머지 빗자루도 쓰러지고 없다

라는 얘기다. 여기서 '빗자루'는 예(例)일 뿐이니, 머릿 속에서 지워야 한다. 그처럼 실체가 있는, 구체적 형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형상(실체)에 붙어있는 '가치'(value)부분을 따로 떼어서 말하는 것이다,

'두 빗자루의 예'로서는, 상반된 것은 서로의 가치를 두드러지게 만든다 라는 상보성과 상생(개념)을 설명할 수 없다,

 

사람들이 '깨끗함'을 좋아하는 것은, 그 반대되는, 더러움은 싫다 라는 생각 때문이요, 그런 연고(緣故)로다,

(=반야심경, '불구부정'의 의미). 비현실적인 가정이나 세상에 더러운 것(=더러워서 싫다 라는 가치관념)이 다

없어지면, 깨끗해서 좋다 라는 가치도 사라지는 것이다. 이로써, 깨끗함의 가치는 더 이상 칭송받지 못한다;

그러므로, '더럽다'라는 부정적 가치도 나름대로 인정해 줘야 옳다. 요약하면, '더러운 것이 있으므로 해서 깨끗한 것이

떠 받들어지고 있을 뿐이로다'... 한 쪽이 밝을 수록 그 반대 쪽은 더욱 어두워 지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逆도眞).

 

깨끗함과 더러움의 가치를 예로 들었지만, 모든 사물은 이처럼 상반된 가치를 바탕으로 (사람들이 받아들여)

존재하는 것이다, 만약 여기서 예외가 있다면, 우리는 그 존재를 제대로 인식하거나 받아들일 수가 없다,

'한 존재(가치)를 인식하려면 그와 반대되는 존재(가치)가 반드시 필요하다' 라는 것이 '색즉시공 공즉시색'입니다.

앞선 글에서는 '이것이 진리다' 하여; 그렇다면 앞으로 '나쁜 쪽'(가치)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가,

사랑과 자비, (해원)상생, 상보성, 연기법 으로 받아들여야 마땅하다; 이들은 다 같은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죽을 고비를 열 차례 이상 넘겼습니다. ​

그 아찔했던 순간들, '내가 죽어도 벌써 열 번 이상은 죽었을 것'이란 생각을 하면, 하루하루가 덤이고,

나날이 겪는 고통들, 힘듦 따위는 (내가 이미) 죽어 없어졌음에 비할 바가 못되는 '하찮은 것'들이다,

상대적으로 비교해서, 새롭게 해석하여 받아들이는 것을 반야심경에서 '조견(照見: 비춰 봄)'이라 하였습니다.

 

이는 많은 사람들이 하고 있다, 연이나 그 치명적인 순간의 기억들은 시간이 흐르면 흐릿해 지는 법이다,

'내가 죽었을 수도 있다, 훨씬 더 나빴을 수도 있다' 이런 식으로 돌려서 생각한다고 해서, 그 고통과 힘듦이

없어지는가? 아니다! 단지, 그 힘듦을 극복하고, 다시 일어서게 만든다면 그런 테크닉은 필요한 것이다,

 

1. 과거에 더 힘들었거나, 죽을 뻔했던 자신의 경험에 비춰본다면, 현재의 내 고통은 극복해 낼 수 있다.

 

2. 확장하면, 반야심경의 '색수상행식'이니;

세상 모든 것이, 서로 상반된 가치에 기대어 자신의 가치를 누리고 있을 뿐 이란 것을 깨닫고,

편향된 가치추구 사고방식에서 벗어나라; '좋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요,

그와 반대로, '나쁘다'라고 하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를 모르고 한 쪽만 좋다 하거나

반대 쪽은 없애버려라, 죽여버려라 한다면; 이를보고 어리석다 (=탐,진,치 중에서 치痴)고 하는 것이다.

 

3. 성인들도, 우리가 진리공부를 하는 것은 '잘 먹고 잘 살자고 하는 것'이라 말했습니다.

따라서, 산 속에 들어가거나, 고립된 삶, 기적을 일으키고 혹세무민하는 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현실 속에서 예전처럼 살면서, 그때 그때 겪는 고통과 아픔을 (진리에 입각해서) 가볍게 하고, 극복하는 테크닉,

이는 도를 닦아야 하는 이유로서 족(足)하다; 기적(奇蹟)따위가 '살아가는 일'보다 더 우선하지 않음은 물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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