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선인(先人)들이 예시(豫示)한 사람이 나였구나!

참 나 2022. 12. 7.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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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모니 부처님의 반야심경,

노자의 도덕경,

예수의 성경,

증산의 대순전경...에서

예시(=例示, 예를 들어 설명) 한 '진리'는 다 같은 것이로다. 즉,

서로 상반되는 양극단의 가치는 서로가 서로에게 존재의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진리'(眞理, the truth)란 말을 하는 데, 바로 이것이 진리입니다.

연이나, 진리를 구(求)하는 모든 사람들이 끝내 이해를 하지 못하고 나가떨어지는 이유가 무엇인가?

'양극단적 가치'란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그걸 설명하겠습니다.

 

종교, 깨달음이란 것은 마음먹는 방법(=心法)을 얘기한 것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오로지 그것 하나 뿐이다,

객관적 대상, 세상 만물(실체) 물질 얘기가 전혀 아닙니다, 따라서 기적(奇蹟),기행(奇行)의 얘기가 아닙니다.

물질에 붙어있는 '가치'를 물질(실체)과 분리해 내서 깨달음의 대상으로 삼는다,

실체와 가치라니? 그 둘이 어떻게 다르다는 것인가? 그것을 구분할 수 있다면 도(道)가 트인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해를 못 하는 한 그 진리(의 설명)란 것은 있으나 마나,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 격이로다.

'진리'란 게 도대체 뭐냐? 아무리 들어봐도 모르겠다 고 하는데, 진리는 오직 한 가지뿐이로다. 뭐냐?

부처님의 '연기법'(緣起法)이로다,

위에 열거한 몇 성인들의 공통된 말씀, 그것이 바로 진리인 것이다. 以下 부연 설명합니다.

 

부처님 말씀을 전하는 '불가(佛家) -조계종 이하'에서는 오늘날까지도 '연기법-진리'를 제대로 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기야, '진리'를 자신의 언어로 설명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지요. 이로써,

석가모니 부처와 같은 성인반열의 사람일 터이다. 이 세상에 그런 인연자는 없는 듯합니다.

이는, 인터넷 검색을 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제가 2020. 1. 17일 드디어 '깨달음을 얻었노라'하고 여기 이 블로그를 통해서 세상에 알렸습니다.

故 봉우 권태훈 옹이 '백두산족에게 고함' 이란 책(65 page)에서 예시(豫示) 했듯이,

단기 4286년에(서기 1953년생)에 보통 사람으로 성인이 나온다'라고 한 인물이 바로 '나'를 가리키는 구나,

 

우리의 성조 단군께서 4286년*에 보통 사람으로 오신다는 것, 

석가모니불이 삼천 년 후에 용화세계가 된다는 것과, 문왕의 선후천 변괘론이 있고 (중략),

 

간혹 '연기법'을 어렵사리 짚어낸 사람도 있던데 그가 부연 설명한 것을 볼라치면 결국 삼천포로 새고 말더라.

역시, 이 사람도 모르는구나... 유튜브 명강사, 유명한 철학교수란 사람들도 모른다,

자신이 깨달았다며 책을 쓴 사람이라 해도 그 역시 어림없다,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면 당대 최고의 선승이라는 (고) 성철 스님도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반야심경의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설명하면서 E=MC²를 예로 들었으나 이는 엄청난 실수였으니

"내 말에 속지 말아"라고 덧붙인 말이 그 참담한 심정을 말해줍니다.

깨달음을 얻으면 아무리 난해한 경전 말씀도 단박에 이해/설명할 수 있으며 가짜를 한눈에 가려낼 수 있습니다.

 

'선(禪)으로 가는 길' 책을 쓴 석지현 씨나 인터넷 명강사 법륜스님, 대한불교 조계종의 홈페이지도 마찬가지다.

이런 사례를 일일이 나열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 좀 안다는 사람이라도 다 들 모르고 있으니,

 

사도행전(Acts) 28:26 ~ 28:27; 진리의 말씀은 듣는다 해도 모른다, 왜냐하면, 고정관념으로 인해서

머리가 돌덩어리처럼 되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들었어도 모르고, 봤어도 모른다는 청지불문, 시지불견

얘기입니다. 원문 생략). 알지도 못하는 '반야심경'을 놓고 위대한 경전 운운한다면 그 무슨 허망한 소린가?

 

본론으로 들어갑니다.

정각한 스님이 나오지 않는 우리나라 불가(佛家)의 연기법 해석은 헷갈리고 더듬이질을 하는 형국입니다.

1. 앞의 것이 있음으로 인하여 뒤의 것이 생겨난다? 나아가, 이것이 있음으로 해서 저것이 있다?

이런 식으로 연기법을 설명하는데, 이를 진리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빈약하고 평범한 말이다,

 

어느 '큰스님'이 "두 빗자루가 서로 등을 맞대고 서 있는 것을 연기라고 한다" 이 또한 그럴듯해 보여도,

절반에 불과한 설명이로다, '두 빗자루'로는 합당치 않다, 즉, 서로 상반되는 것(실체가 아닌 그 가치)을

예(例)로 들었어야 한다, 서로 닮은 '두 개의 빗자루' 정도로는 어림도 없으니 삼천포로 빠진 것입니다.

 

2. 반야심경에서는,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의 세 가지 예를 들었다,

시제법공상(제법이 空 한 모습, 例)이라 하여 a. 生과 滅, b. 垢와 淨, c. 增과 減인데, 이는

생겨서 좋다거나 사라져서 나쁘다, 더러워서 싫다거나 깨끗해서 좋다, 늘어나서 좋거나 줄어서 나쁘다 인데,

이처럼 서로 상반된 두 가치 중에서, 어느 한 쪽이 없다면 다른 한 쪽도 없는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이는 사물의 실체(實體)가 아니요, 그 실체에 따라붙은 가치(價置, 고정관념: 좋다 나쁘다 등)를 말한 것입니다.

a. 실체 와 b. 거기 부여된 가치; 이 두 가지를 따로따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비로소 이해가 될 터인데,

사람들은 세 살 이후 형성된 세상 사물에 대한 고정관념 때문에 이 두 가지를 '그냥 같은 것'이라고 인식해 버린다,

따라서, 제아무리 똑똑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연기법(진리)을 이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은 그냥 사람인 것인데 색안경을 끼고 재단해 버립니다. 이때, 그 사람의 다른 가능성(가치)은 사라집니다.

그것이 편견과 고정관념이란 것이다. 마찬가지로, 산(山)은 예나 지금이나 그냥 산일뿐인데, 사람들은

높다 낮다, 좋다 나쁘다 하며 거기에 이미지(가치)를 부여한다. 이것이 대상을 재단한다는 것입니다.

크다 작다, 높다 낮다, 좋다 나쁘다, 비싸다 싸다, 잘생겼다 못생겼다, 더럽다 깨끗하다, 맞다 틀리다, 앞이다 뒤다 오른쪽 왼쪽, 둥글다 모나다처럼 서로 상반된 양극단(가치; 희로애락애오욕의 제행/인의예지신충효열 이란 유교적 덕목도 마찬가지)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존재의 빚'을 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상보성'이라고 함).

 

'크다'라는 것은 '작다'라는 것이 옆에 있을 때 비로소 자신의 가치를 뚜렷이 드러낼 수 있다 (=가치가 높아짐).

그 반대로, '작다'라는 것은 크다는 것이 옆에 있음으로 인해서 위축되고 쭈그러듭니다(=가치가 줆).

이로써 알 수 있듯이 진리란 것은 '역(逆)도 진(眞)'이로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이제 비로소, 커서 좋다는 가치는 작아서 싫다는 것이 없거나 사라진다면, 자신의 그 좋은 가치를

내세울 방법이 없다, 그리하여, 상반된 것은 상보적이다(Contradictory is complementary)'란 명제가

나온 것입니다. 이것이 연기, 진리의 정확한 설명입니다.

 

그렇다면 '한 좋은 가치'에 반대되는 '나쁜 가치'를 (우리가) 어떻게 대해야 옳은 것일까?라는 질문이 나옵니다.

깔보고 무시하고, 심지어 없애버려야 한다? 그것이 바로 어리석은 생각(=치痴)이라는 것을

성인들이 지적한 것입니다. 그 나쁜, 반대 가치들은 음지(陰地)에서 도와주고 있는 셈이니,

자비(부처), 사랑(예수), 상생(증산)으로 대해야 미땅하도다(=해원상생 解寃相生),

 

사고나 어떤 나쁜 일을 당했을 때, 주위 사람이 위로하기를, '그만하길 다행이다'라고 합니다. 같은 의미로

서양에서는 '그보다 더 나빴을 수도 있었는데 그만하니 다행이다 (It could be worse)라고 위로하는 말을 합니다.

 

세상살이에서 겪는 '힘듦'을 그보다 더 힘든 것에 비교함으로써, 현재의 고통을 극복해 나간다!

이를 한낱 말장난, 공연한 말씀 따위로 치부해야 할까? 아니지요, 이는 삶을 살아가는 큰 테크닉이다,

반야심경의 '조견(照見:비춰 봄)오온개공'을 원용(援用) 한다면; 비춰보니 모든 고통과 어려움은

상대적인 것이더라, 하여 그리 깨닫고, 고통을 극복하고 건너갈 수 있었다(=도일 최고액)란 말입니다.

 

성경 마태복음 4:4에 보면 '사람이 밥(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말씀으로 산다'라고 하였듯이, 상황이

더 나빴을 수도 있었는데 그만하길 다행이라며 슬기롭게 돌려 생각하며 힘을 얻고 다시금 일어서게 만든다,

격언, 속담은 '半 진리' 로다, 삶의 어려움을 이겨내는데 필요한 것이면 그것은 좋은 것, 생명의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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