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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禪師), 대가(大家)라 한들...

참 나 2022. 12. 25.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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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사'라 하면 불가의 대단한 인물인 것 같지만, 다음의 글을 보면 웃음밖에 안 나옵니다.

주역(周易)의 대가 야산(也山) '이달'과, 선승(禪僧) '신소천'이 수작하는 장면을

강호동양학 연구소장 조용헌이 중앙일보에 올린 글*에서 발췌했습니다.

 

제목: 선승 신소천과 한판 승부: 중앙일보 W8, 2004.4.23

(전략) 이번에는 야산(也山) 이 질문을 던졌다. "금강경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아뇩다라삼막삼보리심에 있습니다" 야산이 다시 물었다. "그 극치점이 무엇입니까?"

그러자 신소천은 들고 있던 염주를 책상 위에 탕하고 떨어뜨리며 "파상(破相: 상을 부숨)"이라고 대답하였다.

보통 사람 같으면 이 대목에서 감동을 받으며 말문을 닫았을 것이다. 그러나 야산은 멈추지 않고

또 한 수를 날린다. "파상이라면 너도 없고 나도 없고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 아니오" 하니까 "그렇소"

"금강경에 보면 '일체의 모든 법(有爲法=가치놀음)이 꿈, 환상,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 이슬, 번개와 같다(=如)'고 하였는데, 선생의 주장대로라면 이슬과 번개가 파상이란 말이오?

그 순간 신소천이 약간 당황하면서 "그건 순간(瞬間)이오"라고 대답하였다.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라고 하면서 이슬과 번개는 '있다'란 말이냐?라는 되물음, 반격이었다. (후략)

 

야산(也山)은 주역 쪽이니 깨달음은 모른다 치더라도, 금강경의 본질을 깨쳤다는 선승으로

1950년대 소문났던 신소천(申韶天); 그는 '깨달음'은 커녕 불교(금강경)의 핵심 사상을 알아듣게끔

설명해 내지 못한 것으로, 김석진의 책 「스승의 길 주역의 길」에 기술되어 있다.

 

"파상(破相)!" 하고 일갈했으면 그에 이은 설명으로서, 사람들은 세상 모든 만물(=제법)에 대해 선입견,

고정관념, 편견을 갖고 대하는도다. 세상 만물에 따라붙어 있는 온갖 가치들(=相)은 그 각각의

반대 가치와 상호의존하는 관계에 있으니, 석가모니는 이를 '파상'하라는 가르침이었소.

그쯤 했더라도 '깨달음을 얻은 것'은 아니다. 가까이는 갔으되 정각(正覺)에는 까마득할 수가

있으니, 그것이 야산, 김석진, 조용헌 제씨의 입방아에 오른 연고이며, 이 글에까지 오른 것이다.

 

오래전에 스크랩했던 신소천 얘기를 읽어보면서, 그는 '깨달음을 얻지 못한 선사'라고 말하는 것은,

물거품, 이슬, 번개 등의 실체적 존재들을 놓고 "그건 순간이요"라고 대꾸한 부분입니다. 결론은,

불가의 이런 딱한 모습인데, 성철 스님이 '불생불멸'을 설명하면서, E=MC², '질량불변의 법칙'운운한 것

이라든지 법륜 스님이 '부증불감'을 설명한다면서 '비행기 안에서 용변을 보았다고 해서 비행기 무게가

줄어들지는 않는다' 운운 한 것처럼, 물질의 법칙으로 불법(=心法)을 설명하는 것은 다 '망발'이로다.

 

'상(相)'이란 것은, 물질에 붙어있는 가치 관념(=유위법)을 말한 것이로다.  그것을 물질 그 자체로 설명을

한다? 이들은 '심법(心法)이 뭔지도 모르고, 깨달음의 초입에도 들어서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금강경에서 꿈, 환상, 물거품, 번개 등이 허망하다고 한 것은, 물질 그 자체가 아니라 거기에 붙어있는

가치부분(=相)이로다. 마찬가지로, 반야심경도 '시제법 공상'이라 하며, 세 가지의 공(空) 한 예(例)를 들었던 바,

부증이면 불감이요, 불구면 부정, 불생이면 불멸이로다;

번역하면; 늘거나 줄어들고, 더럽거나 깨끗하고, 태어나거나 죽어없어지고...를 예로 들었던 것인데;

이처럼 증/감, 구/정, 생/멸...의 상반된 가치들 중 한 쪽은 그 반대쪽에 의존하여 빛을 얻고 있는 것이로다,

물질 그 자체가 아니요, 물질에 매겨져서 우리가 받아들이는 가치부분이로다 

 

바로 이 대목인데, 이처럼 실체(=있는 그대로)와 그 실체에 부여된 가치를 따로 떼어서 (어렵게 나마) 인식할 수 있다면,

그는 '깨달음'의 초입에 들어선 것이다, 가히 '죽음을 맛본 사람'(=taste of death; 필요조건) 입니다.

실체와 가치가 한 덩어리로 돌아가면 속세(=此岸, 삶)요, 떨어져 보이면 피안(彼岸: 판 밖, 요단강 건너, 죽음의 맛)이로다, .

만물(諸法)이 갖는 '한 가치'는 그 반대짝 가치에 의존한다. 따라서, 자기의 절대가치가 아닌

상대가치로 빛이 나는 것 뿐이다;  이로써, 한 쪽이 사라지면 반대짝도 사라지니 '허망하다'라고 하였다.

예: '나쁜 것, 또는 나쁘다 라는 생각'이 사라지고 없다면, '좋은 것, 또는 좋다 라는 생각'이 존재할 수 있을까?

또는, 흐리고 궂은 날이 없다면, '맑은 날'을 보고서 '좋은 날씨(!)'라는 표현을 할 수 있을까?

'맑은 날'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니, 좋고 말고의 생각 자체가 없을 터이다.

결론;  세상의 온갖 '나쁘고, 싫고 부정적인 것'들을 어떻게 대해야 마땅하겠는가? 이에 대해서,

부처님은 자비, 예수님은 사랑(矜恤: 가엾게 여김, mercy), 증산은 상생(=쌓인 원한을 푸는 '해원')으로

대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리하면, 너희가 복(福)이 있고, 덕(德)을 쌓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지금껏 (잘못) 알고, 오해하고 있는 그 '대단한 단어'들의 원 뜻(=落處)은 바로 그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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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깨달음'을 설명하는 '양대 축(軸)'이 있는바;

그 하부 개념으로서의 '연기법'에 대해서는 이 정도 설명으로 되었고,

그 상부 개념인 '참 나'(=의식 그 자체; 하나님)에 대해서는 전혀 다른 설명이 전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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