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에서 도닦기

석가모니 부처; 강을 건넜으면 뗏목은 버려라

참 나 2023. 1. 19.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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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강과 맞닥뜨린 나그네는 궁리 끝에 뗏목을 만들고 노를 저어서 강을 건너갔다.

나그네가 강을 다 건넌 뒤에는 그 뗏목을 어떻게 처리할까? 가지고 갈까? 버리고 갈까? 답은 분명했다.

 

"수도승들이여, 내 가르침은 바로 그 뗏목과도 같다,

강을 건널 때 잘 썼다면 그것으로 뗏목은 역할을 다 한 것이다"

 

'석가'의 가르침은 피안(彼岸)의 이치(=연기법)를 일러주면서 고통의 강을 건너게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신(神)'에 관한 얘기는 일체(一切)하지 않는다. 왜냐? 그것은 일상의 고통을 더는데

도움이 되지 않으며 궁극의 니르바나(열반/해탈)로 이끌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신(神)을 알더라도 고통과 번민은 계속될 뿐이로다. 따라서, '석가'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너희의 고통과 불행에 대한 치유 방법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말하지 않은

많은 것들에 대해서는 왜 그랬는지를 알고 기억하기 바란다"

- 축(軸)의 시대 (The Great Transformation) pp.484~485, 교양인, 2010 초판, 2022년 20쇄 발행

 

'석가'의 가르침은, 삶에서의 고통을 건너자는 것이다. 잘 꾸며진 (종교)체계를 전하는 게

아니다. 즉, '꿩 잡는 게 매'라는 말이다. 사람들의 고통을 덜거나 없애면 되는 것 뿐이었다. 그것이

석가의 (진리에 입각한) 실용적 가르침이었다. 아무리 심오한 이론을 펼치고 장광설을 편들,

삶의 고통을 없애는데 실질적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뗏목을 버려라' 라는 뜻은 또 있다, 뭔가? 깨달음은 늘 필요한 것은 아니다 란 얘기다.

우리의 삶은 현실인데, 그 발등의 불과도 같은 현실을 살아가는데, 항상 초탈한 모습일 수는 없다,

깨달음(해탈,열반)은 폼을 잡고 남들 앞에서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깨달음'은 잘 간직했다가 내 삶의 고통이 밀려올 때마다 되새김질을 하면 될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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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법-진리'는 석가가 얻은 깨달음의 정수(精髓)이지만, 이를 터득하고 실천하는 것은 고사하고,

뭔 소린지 아는 사람조차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수행자, 스님, 철학자, 도사연 하는 이들 조차도 장님이

코끼리 다리를 만지는 격이었으니, 그 진리는 사실상 '있으나 마나'한 것이었다. 그도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진리란 피안(彼岸)의 것이므로, 죽어야나(=삶의 집착을 놓음) 닿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만하길 다행이다 (It could be worse)'

내가 '어떤 일'로 인해서 힘들고 불안하고 고통스럽다면 그 보다 훨씬 더 고약하고

나빴을 수도 있었던 상황을 떠올려보라; 그 이미지가 생생할 수록, 연습을 할 수록 효과적이니,

이는 내가 보고, 듣고, 겪는 것들은 결코 '절대적인 것'이 아니므로,

그 보다 '더 큰 것' 앞에서는 작아지게 되는 이치(理致)로다, 그걸 이용하라는 말씀이로다.

석가의 연기법(=心法/ 空: 부증불감, 불구부정, 불생불멸)이란 바로 그런 것이었다.

 

부연하면, a. 그 사고는 더 심각하고, 치명적일 수도 있었다, 내가 죽을 수도 있었다,

b. 잘 아는 친구가 비참한 삶을 산다거나, 불행한 사태에 처한 친지의 딱한 모습을 떠올리거나,

c. 아쉽게도 먼저 저세상으로 떠나 간 주변 그 누구를 떠올리거나 해서,

 

자기 위안을 얻고, 가슴을 쓸어내리고, '아직 살아있는 나는 그나마 훨씬 낫다'라며 힘을 얻는다면,

그러한 테크닉(='그만하길 다행이다')은 실용적 가치가 큰 것이로다. 이는,

저 푸른 하늘에서 아무 소리도 없는 '백보좌 하느님'보다 훨씬 실용적인 것이다.

 

※ 반야심경의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 모든 고통에서 벗어났다)' 이라고 한 문구는

현장(玄奬;602-664)구마라습(鳩摩羅什; 344~413)의 번역본에 모두 실려있습니다만,

Edward Conze(1904~1979, 독일계 영국인)의 '영문 반야심경'에는 이 부분이 없습니다,

인도인으로 중국에서 활동하던 '구마라습'과, 그 한참 후에 삼장법사(서유기-손오공으로 유명한)가

산스크리트 반야심경을 한문으로 번역할 때 '도일체고액'이란 문구를 임의로 집어넣었던 것이다,

인도사람 '구마라습'은 산스크리트어를 잘 알았고, 오히려 중국인보다 더 한문에 능통했다고 하는 천재였다,

현장도 약15년동안 인도에 머물면서, 산스크리트어 심경과 구마라습의 번역본등 다양한 자료를 섭렵하였다,

[출처]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 작성자 해인 을 가필하였음.

 

'에드워드 콘즈'의 영문 반야심경을 찾아 올립니다.

*The noble bodhisattva, Avalokitesvara, being engaged in practicing the deep transcendental

wisdom-discipline, looked down from above upon the five skandhas (aggregates), and saw that

in their svabhava (self-being) they are devoid of substance.

('조견오온개공'으로 마치고 있고, '도일체고액'부분은 없습니다. 그 외 전체적으로 넘겨짚기식이란 점은 모든 번역이 다 마찬가지...ㅠ)

[출처]https://www.youtube.com/watch?v=kGqLDRQ9vPs Prajna paramita Hridaya Sutra, Imee Ooi...

blog.naver.com 작성자 우주인

 

원본에도 없는 '도일체고액'을 왜 굳이 끼워 넣었을까?

깨달음을 얻은 제 눈에도 '도일체고액(=삶의 모든 고통으로 부터 벗어남)'은 포장(包裝)인 것이 보입니다.

'석가모니'는 대근기(大根器)에다,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는 만신창이 수행을 통해서 겨우 '깨달음'을 얻었다.

후세인들이 '반야심경'을 읽어 깨달음을 얻고, 이로써 '삶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일이 얼마나 가능할 것인가?

천에 하나 만에 하나 있을까 말까 하단 것을 알고있는 석가(본인)이 그처럼 당돌하고 무리한 수사(修辭)로

혹세무민하듯, 사람들을 유혹했을 리가 없다,

오늘 인터넷 검색을 해 보니 과연 영문 번역본에는 없다; 말하자면 구마라습과 현장이 끼워 넣었던 것이다,

이들은 산스크리트 반야심경을 한문으로 번역하면서, 그 난해한 말씀이 후세에까지 끊기지 않고 전달되려면,

최소한 이 정도의 문구는 있어줘야 한다고 생각했으리라.

(참고: 도일체고액, 이 구절이 끼워넣은 것임을 짚어낼 정도라야 '깨달았다' 라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이처럼 경전에 손질을 하는 일은 부지기수인데, 예를 들면, 기독교/가톨릭의 성경에서도

초기경전에는 없었던 '예수가 부활했다'라는 내용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마가복음 16:9 ~ 16: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