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색즉시공 공즉시색'

참 나 2019. 10. 11. 11:26

■ 色卽是空(색즉시공)

'가치 있다(色)'를 말한다는 것은 '가치 없다'()는 것이 의식바탕에 깔려 있음으로서(是) 가능한 것이다.

例: '예쁜 여자'(色,가치)를 대하는 마음은, 그 반대되는 못생긴 여자(空,가치없음)를 바탕에 깔고 있는 것이다.  

 
■ 空卽是色(공즉시색)

'가치 없다(空)'를 말한다는 것은 '가치 있다'()는 것이 의식바탕에 깔려 있음으로서(是) 가능한 것이다.

例: '못생긴 여자'(空)를 대할 때의 마음은, 그 반대되는 예쁜여자(色)의 가치를 (이미) 바탕에 깔고 있는 것이다,     


색(色), 공(空)처럼 서로 반대되는 것(이분법적 가치관)은 반드시 '한 세트'로 작동하는 것입니다.  

한 쪽은 반대 쪽과 더불어 존재한다,  한 쪽이 없어지면 반대 쪽도 없어진다, 이를 상보성(相補性)

이라고 하는데, 연기(緣起)와 같은 뜻입니다. (※"相反되는 것은 相補的인 것이다" - Niels Bohr)

즉, '앞'이란 말이 없어진다면, '뒤'란 말도 저절로 사라집니다.  

例:  아파트나 학교에서 '앞 문'과 '뒷 문'이 같이 있을 때는, 앞, 뒤 라는 말이 필요하지만,

      어느날 '뒷 문'이 없어졌다면 그 후로는 '앞 문'이란 말은 쓸 일이 없어집니다(=色不異空 空不異色)     


'색즉시공 공즉시색'은, 佛家의 핵심 메시지이자 깨달음의 정수인 '연기'(緣起)를 풀어서 쓴 것입니다. 

色과 空을 '가치'라는 단어로 풀어낸 것은, 본인의 독창성(知的財産權)입니다.  다른 어떤 단어로도

   色과 空의 비의(秘意)를 이처럼 명료하게 짚어낼 수는 없고 더군다나 '空卽是色'은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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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가 있다(色), 없다(空)란 말은, 생겨났다/없어졌다, 깨끗하다/더럽다, 높다/낮다, 맞다/틀리다 처럼

이 세상의 모든 형용사(形容詞)에 그대로 다 적용됩니다,  然이나, 사람들이 어떤 평가를 하고 선호하던

일체 상관없이, '객관적 실체'는 늘 그대로 존재합니다.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例:  "나쁜 개는 없다"란 말을 하는 경우, 개 '몸뚱아리(=실체)'는 누가 뭐라고 하던지 그냥 있는 것이다, 

'나쁘다' 라는 가치만 없다는 뜻이다. 이처럼 개, 사람, 세상만물은 본래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습니다, 

대상의 어느 한 측면을 보고 좋다, 나쁘다 라고 하면서, 가만히 있는 것을 들었다 놨다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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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상(물건,사람..)은 거기에 부여된 가치(명칭, 라벨딱지)와 상관없이 '스스로 존재'하고 있다,  

따라서, 내가 관점을 달리해서, 즉 '있는 그대로',  대한다면, 대상(물건,사람 등)은 얼마든지 새로운 

면모를 나 한테 보여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뭔가 정해놓고 대하지 말라, 내 생각,감정,오감을

빼 버리고 '모른다' 고 하라그러면 얼마든지 뜻밖의(새로운, 신선한)모습을 대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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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에 색칠한다, 정해놓고 대한다'... 이런 무지함을 지적하면서 "산은 산, 물은 물" 이라 한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를 보라'는 이 말은, 존재 그 자체를 보라는 뜻입니다. 존재(대상)에 덧씌워진 가치판단

(선입견, 고정관념)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상을 보는 순간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선입견을

어찌하리오?  (※돈을 한낱 종이인쇄물로, 黃金을 돌 같이 본다... 라면 피안彼岸의 경지일 터)

그래서 '수도행위'(修道)가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진리를 말로 설명(說明)하는 일은 어렵고 또 어렵습니다. 설명을 하면 할 수록 말의 수렁에 빠져 버린다,

'반야심경'을 아는 척 하는 사람, 선지식, 심지어 반야심경을 편찬해 냈다는 '현장'조차도 '진리'(緣起)를 

이처럼 ​평문(平文)으로 설명하기는 어려웠으리라. 허다한 선사(禪師, 선지식)들이 다 실패했습니다. 

인터넷 검색을 해 보면 압니다.  즉, 무슨 소리를 한 것인지 도대체 알아 을 수가 없더라.  

그 중에는, 그럴 듯한 설명을 하다가도, 막상 예(例)를 든 것을 보면 이내 또 엉뚱한 소리를 해 놓았더라,

밑천이 달리니까 자세한 설명을 못해내는 것입니다. 

깨달음을 얻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설명하는 것은 또 다른 얘기다. 한 사람이라도 더

깨달음에 접근할 수 있도록, 백 번, 천 번을 다시 써 낼 수 있는 '근기(根機)'가 필요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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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釋迦牟尼, 老子, 증산을 위시하여, 현장, J. Krishnamurti, 성철, 청담, 석지현, 보우, Niels Bohr,  

윤홍경, 법륜 등이 이 글에 (陰,陽으로영감과 영향을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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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치놀음'은 세상살이(속세)의 본질입니다, 

然이나, 진리(眞理)와 속세(俗世)는 정반대(正反對)의 길을 갑니다,  그러나,

  양자(兩者)는 상보적이다,  즉, 진리는 속세가 타락할 수록 더욱 그 '가치(必要性)'가 드러나고,   

그 반대로, 속세는 진리의 밝음으로 인하여 그 타락함(貪, 嗔, 痴)이 더욱 드러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