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하나님은 '푸른하늘'에 계신 존재가 아니올시다

참 나 2019. 6. 1. 12:44

만약, 기독교가 하듯이 하나님은 하늘 위에 계시다 (주기도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고 한다면, 내 몸에서는

성령(聖靈)이 빠져나가 있다는 뜻이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자기 스스로 '좀비'가 되겠다는 얘기인 것이다, 

(교회에 나가서 '하나님'을 믿어 보려고 할 때, "내가 지금 뭔짓을 하려는 것이지?" 이러한 경계심이 드는 것은 이 때문이다 )

따라서, 저 푸른 하늘 어딘가에 계실 것 같은 하나님을 향해서 "이제부터 어찌하오리까?"하며 

바보같은 질문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 "내 뜻대로 말고 하나님 뜻대로 하옵소서" 라고라?

이는, 푸른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해라, 말아라"하고 답변을 한 적도 없고, 그럴 리도 없거니와,

내 스스로의 '주체적인 삶'이 아니란 점에서, 그런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문제'인 것이다, 


내가 한 모든 일은 내 책임이다, '하나님 뜻대로'...라고 한다면, 나는 주체적인 인간이 아닌 좀비인 것이다, 

'내 책임이 없다' 라는 생각도 들지 않겠나?  과연 어디까지가 내 뜻이고, 어디부터가 저 푸른 하늘 하나님 뜻인가?

이런 말도 안되는 황당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언필칭 세계종교, 고등종교 라는 '기독교, 천주교'였더란 말인가?

어찌 지구 상에 사람만이 존재(存在)하리?  저 들판의 온갖 짐승과 물 속의 물고기들, 산과 들의 나무, 헤아릴 수 조차

없는 무수한 미생물들은,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거나 말거나, 뭐라 하든 말든, 살아가는 데는 아무 상관도 없었다,


'기독교'가 없었어도, 인류와 그 조상들은 '자기완결적, 자기 책임적인 존재'로서 수 수 억년을 살아왔다,

앞으로도 그리 살아갈 것이다, 컴퓨터를 켜면 '하드 디스크'가 돌아가듯이, 하나님이 하늘에 따로 계시어서,

우리들 삶에 일일이 관여하고, 기독교인들의 기도와 소원을 들어준다 라고 하는 것(祈福信仰)이 말이 되는가?


아니다, 하나님은 누구의 편을 들어주는 존재가 아니다,  그것은 '인과율(因果律)'의 우주법칙에 어긋난다, 

이미 우리 몸 안에 늘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나는 이제껏 저 푸른 하늘의 하나님이 없더라도 

잘 살아왔고 앞으로도 의연하게 살아갈 수가 있다.  그렇다면 '내 안의 하나님'이란 것은 무엇이냐? 


만물 만상을 '거울에 비추이듯이 알아차리는(awareness)의식' 이다, 모든 생명체의 플랫폼(platform)이다,

'마음'보다 더 깊은...심연의 의식, 심층의식, 생명의식이다,  동,식물과도 교감할 수 있는, 뭍 생명 공통의

근원의식이다, 우주를 꿰는 단 하나의 바탕('참 나')'이다,  거기서는 모든 것을 다 알아채고 있다. 그래서 '밝다'

'그 자리'를 달리 표현할 단어가 없기에, 예수님은 '하늘나라(天國 heaven)'라고 제자들에게 말했던 것이다.  

하늘나라(天國)란 것은, 암껏도 없는 저 푸른 하늘, Sky(하늘)가 아니다, 거기서 무슨 놈의 하나님을 찾는다고라?


어린아이들은, 어제 있었던 좋고 나쁜 일들을 마음에 담고 있지 않는다, 

이것이 성철스님의 '산은 산, 물은 물' 이란 것이다, 즉, 선입견/편견 없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과 상태를 대한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서 너 살 이후의 삶이란 것은 좋거나 나빴던 경험들로 얼룩져 있다. 

그것이 세상을 대할 때, 이미 벌써, 선입견과 편견으로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어제의 (좋고 나쁜)기억을 갖고 대하는 '오늘'은 새로울 수가 없다!  어제의 재탕일 뿐인 것이다,

바로, '지두 크리슈나무르티'가 말하고 또 말한 "새로운 것을 보라 (=경험, 선입견을 배제한 '있는 그대로'를

보라는 뜻. 세상의 가치관으로 대상을 저울질하지 말라. 산은 산, 물은 물과 같은 맥락)"고 하는 메시지다. 

그렇게 안 하니까 삶이 지루하고 따분하다, 유교 경전, 대학(大學) 첫머리에서 말한

'大學之道 在新民'(대학에서 말하는 道란, 사람을 새롭게 하는 것)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속세'라는 가치관(흙탕물)에 물들고 만다,  삶은, 날마다 천국에서 지옥으로의 타락이다,

'도를 닦는다'라는 것은, 살아 갈 수록 물든다는 것을 깨닫고, 그것(선입견/편견)을 부지런히 닦아내는 것이다,

하여, 道를 '닦는다' 고 말한다, '깨달음'이란 것은, 온갖 선입견에 물들기 전인 얼추 세 

(三尺童子, 키가 1m가 채 안되는) 때의 '순진무구(가치판단 없음)'한 상태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도문에 입도(入道)할 때, 선각이 이러저런 얘기를 하면 "차라리 날 죽으라고 해라"는 생각이 듭니다. 

선각의 말은 문자 그대로 '삼척동자'가 되라는 것은 아니지만, 무장해제(가치판단을 버려야 한다니까)나 

발가벗겨지는 느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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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예수가 제자들에게 '가르쳐 줬다'고 하는 '주님의 기도문'(Lord's Prayer)은 좋은 문장입니다.   

문제는 '하늘나라(heaven)'란 단어의 해석을 (예수 사후에 만들어진 이른바 '기독교'가) 제멋대로 '변질시켰다'는 것이다. 

대중의 인기/영향력를 얻기 위해서 '더러운 손질'을 했던 것이다, 그들은, "이러나 저러나 대중은 어차피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늘나라(heaven)는 결코 '푸른하늘(sky)'이 아니올시다, 

하늘 위에 하나님이 인격신으로 존재한다는 발상이 '우주 개척시대'에 얼마나 유치한 것인가

(하나님이 하늘에 있다면, 새가 먼저 알아차릴 것이요, 바다 속에 있다면 물고기가 먼저 알아차릴 것이다)

그럼 뭐냐? 인간을 비롯해서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들의 '심연의식,근원의식,공통의식'으로 해석하면 

깔끔하게 정리된다(豁然貫通), 물론 그리하면, 조작된 기독교는 무너져 버립니다. 

그들이 이단이라 매도했던 '영지주의(Gnostic,西紀80~200년에 번성)'가 옳았던 것이다,  


以下「성서 밖의 예수」(Gnostic Gospels), Elaine Pagels, 방건웅/박희순 옮김, 정신세계사 2003, '옮긴이의 글'에서 발췌:

"예수님 께서는, 내 밖에 있는 外的 對象으로서의 하느님이 아닌, 마음 속에 있는 신성(神性)을 찾으라고 하시었으며,

이것은 요한복음의 '천국은 마음 속에 있다'는 구절과도 같다, 이는 또한, 불성(佛性)이 마음 속에 있으니,

그것을 등불 삼아 진리를 찾아가라는 부처님의 말씀과도 같다,  진리는 결국 하나일 수 밖에 없다" 이하생략. 


             '참 나'를 알면, 살생 행위는 물론이고, 그것을 지켜보는 일조차 끔찍하게 느껴집니다.

  낚시를 비롯하여 잡은 물고기를 해체시키는 일, 생명체들이 죽으면서 겪는 고통이 고스란히 나한테 전달된다, 

            불가에서 (동물)고기를 먹지 못하게 하는 것이 왜 그런지 알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