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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난도의 키워드: 연기, 분리의식, 상생/조화, 개벽

참 나 2016. 2. 1. 22:16
하얀 여백(바탕 종이)과 글자와의 관계...는 불가에서 말하는 '연기' 입니다.

종이와 글자는 그 둘 중에서 한 쪽이 없으면 다른 한 쪽도 없습니다,
그 두 개는 서로 의지하며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서로 대립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나
사실은 상보적이다, '서로가 상대방을 존재하도록 만든다' )
흔히 인과관계로서 연기를 풀이합니다. 즉, 앞선 일로 인해서 뒤의 결과가 생긴다는 것인데, 
그 정도의 싱거운 얘기라 하면 굳이 불가에서 말할 필요가 없지요. 전혀 그런게 아닙니다. 
연기 <緣起>가 내포한 '깊은 뜻'을 모르기 때문에 생긴 오류입니다.

연기는 대립하는 양쪽이 있음을 전제로 말하는 겁니다.
사람들은 대립하는 양극단 중에서 한 쪽을 선택하여 좋다/싫다 혹은 있다/없다고 합니
다.
이런것을 '분리의식' 이라고 하며, 이는 편파적이고 잘못된 인식입니다.

분리의식이란게 도대체 뭐냐?
만물 만상은 '제 홀로 존재한다'는 단견이지요. 무지의 산물입니다. '연기' 와는 반대입니다.
이런 편견, 무지를 이제부터 깨뜨려야 합니다. 글자만 인정한다면,  바탕이 된 종이(의 존재)는
외면/무시 당하는게 됩니다. 고로 억울하다, 부당하다...하는 겁니다. 
수 수만년, 인류역사는 이런 식으로 만물 만상을 (분리의식으로) 재단하며 살아왔습니다. 
이미 보편상식이 되어 달리 생각할 여지조차 없습니다.
 
이 그릇된 이분법적 사고 (=만물 만상을 서로 대립하는 두 개로 나누고, 그 중 한 쪽 만을 
좋다,
나쁘다고 하는 것) 에 바탕한 관념들을 이제부터 바로 잡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무시당한 
나머지 절반이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들고 일어납니다. 세상을 뒤집어 엎습니다.

요즘 매스콤, TV뉴스를 보면 이미 뭐가 옳고 그른 것인지 헷갈리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감방에
갔다온 사람도 나름 행세하는데 지장이 없고, 전에는 나쁘다 아니다...했던 것들도 이젠 당당히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회범죄를 두둔하자는 얘기는 아닙니다)
  
글자를 보면서 바탕이 된 종이도 봐 준다...! 
착함을 추켜 세울 때 동시에 악함의 존재가치도 따로 가려줍니다.  
자식이 아무리 못났어도, 부모는 자식을 내버리지 않습니다. 안타까워 합니다. 그렇게 대하는
겁니다. (아픔이지요, 이것이 예수의 사랑, 부처의 자비란 것입니다)
그동안 용서받지 못한 존재, 감정적으로 단죄당한 것들의 존재가치를 제대로 평가하고, 인식
하자는 겁니다. 
 
'어둠'이란 바탕으로 밝은 '빛'이 존재한다는 (연기)인식,  '못남/꼴등'이 바탕이 되어 '잘남/일등'
가치가 존재한다는 (연기)인식,  '더러움/무질서'가 있어야 비로소 '깨끗함/질서'가 존재한다는
(연기)인식 등...
하여, 한도 끝도 없는 이분법 사고, 분리의식이 지배해 온 세계를 이제 그만 마감하는 겁니다. 
제부터는 양극단의 조화를 찾아야 합니다. 이 모든 분리의식을 극복하는 지혜가 불가에서
말하는 '연기'란 것입니다.  서양인 Peter Erbe가 말한 '참된 의식' 이란 것입니다. 

연기, 참된의식으로 (해원)상생하자는 겁니다.  개벽이란 것도 이렇게 열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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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저는 이제 비로소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개안했습니다. 깨달음 초견은 한 듯 합니다.  '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지난 시절, 몇 차례에 걸쳐 카타르시스적으로 눈물을 바가지로 쏟고, 일주일을 내리 통곡한 적도 있었습니다.

친한 친구의 얼굴을 보면서, 도문에 입도시켰던 선각의 얼굴을 보면서 (...이사람이 왜 나와 똑같이 생겼지?)

당혹스러웠던 경험이 있습니다. 나 한테 죄를 지은 사람 눈동자에서 노랭이가 뱅뱅도는 것도 봤고, 요즈음도

뭔가 겁에질린 사람은 얼굴에 그것이 나타나는 것을 봤습니다. 무엇보다도 세상의 모든 종교/ 명상이 하나의

진리로 귀결되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게  '참  나'를 알았습니다. 신명계가 열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