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察人事

'中庸' 의 실천적인 메세지

참 나 2004. 9. 13. 10:35

어제는 비오는 일요일... 중용(中庸) 책장을 넘기며 하루를 보냈습니다.

 

'중용은 극단적인 생각을 하지 아니하니... 지나침이 없는 길(道)...이다.'

참 듣기 좋은 말 이지요?  그러나 중용이 甲男乙女... 즉, 평균적 인간의 '보편성' 을 지향하고 있다고 말한다면 다소 의외라 하시겠지요?     

 

小人而無忌憚...즉, 사람들은 대체로 넘치고 또 모자라는 존재들이지요.  

좋게 말하면 가식 없는 적나나한 모습들 입니다.  감정, 이해관계에 민감하고 예민하게 반응합니다. 욕심, 집착, 사특한 생각, 오해를 잘 하는데...성치 못한 유전자 (DNA) 의 탓도 틀림없이 있을 겁니다.

 

그러나 한 켠에서는 또 말리는 이가 있습니다.  당사자가 흥분하면 제삼자는 말리고... 사람 사는 모습...인간의 본성... 이는 '中庸' 의 핵심 소재 입니다.  일단은 가라. 그러나 가더라도 어느 만큼, 정도껏 갔다면, 적당한 위치로 되돌아 와라.

진짜 문제는 넘치고 모자라는 것 그것 자체가 아니라... 모르는 것이요, 남의 말을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 는 가르침과 같습니다. 

일단 나를 알면 가다가도 되돌아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관계가 원활하지 못한 것...그래서 남들로 부터 피드백을 받지 못하는 상태... 그것은 반중용적인 문제가 아닐까요?  

 

아예 과격한 생각이나 제스쳐 조차도 쓰지 말아야 그것이 중용...아닐까요?

그럴 수 있다면 그것은 '사람' 이라기 보다는 '神' 이라 해야 겠지요. 무리겠지요. 중용은 '本性에 따른다' 고 했습니다.  본성이란 언필칭 '道' 를 닦은 거룩한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적나나한 인간군상의 모습 이라고 이해 합니다.

 

보편적인 모습 (本性) 과 동떨어져 있는 고매하고 고차원적인 것, 형이상학적인 것들은 모두 다 지나친 (過한...) 것 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타락한 것, 삼천포로 빠진 것, 망가진 것...들은  미치지 못하는(不及) 것들이겠죠.  지나침 이나 미치지 못함 이나 중용에서 벗어나기는 마찬가지요, 바로 과유불급(過猶不及) 이란 말의 뜻이 될 것입니다. 

 

중용은 善 이나 惡,  어느 쪽의 극단도 指向 하지 않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大學 첫 구절에 '지극한 善 에 머문다...' 한 것과는 다르지요.  '至善' 은 극단입니다. 극단...은 매우 위태위태 하지요. 거기에 머문다(在止於至善)는 것은 '미친 짓' 일 겁니다.  

 

입산수도 하는 도인, 수도승 들은 웬만큼 했으면 이젠 속세로 내려와서 대중들 속에서 그 잘난 도력을 몸소 실천해 보여 줄 것을 주장합니다.  산 중에서 '너희는 불쌍하고 나는 거룩하네...' 하고 폼잡아 본들 그것이 뭐 대단한가...  사람들과 부대끼고 고생하면서도 道...를 펼쳐 보여야 그것이 어떻게 좋은 것인지 알 수 있지 않겠나... 중용에 따르면 지극한 도인은 평범한 '보통사람' 입니다. 단, 고심도 하고 집착도 하고 번뇌도 하되....그로 인하여 몸을 망치고 일을 그르치는 어리석음은 없겠지요.

  

싸워라...그러나 화해를 생각하라.  취하라...그러나 너무 집착하지는 말아라.

이런 내용들이 중용의 실천적인 message가 아닌가 생각해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