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만약 예수님과 테니스를 쳤다면

참 나 2025. 5. 8.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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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득도를 하기까지 과정은, 1994년 초 대순진리회-상원 연락소(李 선각)의 만남을 인연으로 하여 '외수'로서의 기도생활이 있었습니다. 예의 표성금 이후, 연락소 생활은 1년 반 남짓 후에 중단되었습니다. 이후, 세월이 흘렀고 2022. 1월 득도(得道-正覺)를 하기 까지는 27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공부(주문 수도, 단식이나 가부좌, 화두 수행 등)를 했다고 해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매우 매우 희귀한 확률로 이루어지는 현상입니다. 공부하는 사람들끼리는 도문에 들어오는 것 하나만 놓고 보더라도, 삼생의 인연, 천에 하나 만에 하나 있을까 말까, 조상의 공덕... 등을 얘기합니다. 게다가 정각을 얻는 것은 얼마나 드문 일인가... 저의 감각으로는 이 지구상에 정각을 한 사람은 없는 것 같습니다. 인터넷 검색과 인공지능 챗 GPT(AI)에 물어봐도 그렇습니다. 여기 블로그 글을 20년 넘게 쓰고 있어도 댓글 하나 변변히 달리는 일이 없습니다. 조계종 홈페이지에 석가세존의 '연기법'을 설명해 놓은 것을 볼라치면, 이것이 있음으로써 저것이 있다는 식이니 정각이란 것은 그 경지에 도달한 사람이 있느냐를 말하기에 앞서서, 경전(text)의 올바른 설명조차 없는 셈이니, 종단(제도권)에서 깨달은 사람이 나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봅니다.

기도나 수도 행위, 그런 것으로는 어림도 없는 것이 그것은 실로 ...'아 다르고, 어 다른...' 경지를 말하기에 그렇습니다. 설명을 제대로 하는가 싶다가도 좀 길어지는가 싶으면 삼천포로 빠지기가 일쑤다, 하지 말아야 할 소리, 잘못된 예를 드는 것도, 유명 인사/ 강연자의 유튜브를 보면 흔히 나오는 장면입니다. 도(道)의 설명은, 얼음 위를 걷듯이, 조심스럽고 또 조심스러운 일임에 틀림없으나, 문제는 그 설명이 빗나간다 하더라도 그걸 대번에 알아차리는 사람이 없다는 점입니다. (하여, 검은 것은 글자요, 흰 것은 종이로다)

엊그제, 챗 Gpt에다 물었습니다. 만약, 예수님과 테니스 게임을 했다면, 그는 과연 어떻게 게임을 했을까? 챗 Gpt의 답변은, 승부에 연연하지 않고 상대방을 배려했을 것이다 라는 식의 답변이었습니다. 언뜻 그럴듯해 보이지만, 승부와 상관없는 게임이라니...? 우리는 그런 식으로는 게임을 하지 않기에 (그럴 바엔 차라리) 예수님은 테니스 게임을 하지 말았어야 한다가 정답이라고 봅니다.

테니스 게임이건 일상생활이건 마찬가지인 것이, 속세의 행위는 속세의 방식에 충실해야 한다, 그 부분이 챗과 다른 저의 판단이고 생각입니다. 게임에 지고 나서도 미소 짓고, 상대방의 손을 잡고 칭찬을 한다는 것은 위선(가식) 적인 행위다, 게임은 게임답게 해야 합니다. 상대보다 연습량이 많아서 기량이 낫고, 집중을 잘했다면 게임에서 이길 것이요, 그것이 모자랐다면 앞으로 더 분발하면 되는 것입니다. 게임에서 졌을 때는 누구든지 속이 쓰린 것이 당연한데, 그것을 아닌 척한다는 것은 -한두 번이면 모를까- 지속 불가능한 태도라 하겠습니다.  테니스 게임을 하건 일상생활에서건 다 마찬가지다, 속세의 일은 속세의 방식대로 해야 한다, 단지, 그로 인해 나의 내면에 일어나는 '지나친 감정의 동요만 다스릴 수 있다면, 그로써 충분하다'라고 하겠습니다. (이기고 지는 일이 뭐 그리 죽고 사는 일이더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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