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반야심경'을 풀고 '한 소식'을 들었다

참 나 2020. 1. 11. 12:40

I.

'성철 스님이 나온 유튜브 동영상(法會場面)을 보았습니다.

"반야심경의 '불생불멸'(不生不滅)을 알아야 한다"라면서 설명을 하는데,

아인슈타인의 '등가성(等價性)의 원리{E=MC 2}'를 예로 들었다,

즉, 물질이 비물질(=에너지)로 바뀌는 현상은 '불생불멸'을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예(例)다,

과연 그럴까요? 그래서, 반야심경의 메시지가 조금이라도 와 닿았나요?

아니지요! 반야심경(般若心經)은 오롯이 '마음 법'(心法)을 얘기한 것이다,  

물질이 에너지로 바뀌는, 그런 물리현상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반야심경은 '연기법(緣起法)'을 말한 것입니다,

화엄경(華嚴經)도 '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세상 모든 것이 다 '마음이 빚어내는 것이로다' 라고 했지요.

즉, 우리가 어떤 대상을 대하거나 또는 생각을 할 때, 우리의 두뇌에서는 반드시 그 '반대가치'에

     '비추어 본(照見)다음에 듣고, 판단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따라서, '반대가치'가 꼭 필요하다, 

   :

이 현상에 대해서는, 인지심리학자(cognitive neuroscientist)들은 알고 있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릅니다.

우리는 결코 대상(對象)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합니다, 그것은 많은 연습(수행修行)이 필요한 일입니다, 

사람의 두뇌는, 대상을 '가치와 의미''(=色)로 바꾼다음에 그것을 받아들이고 있다,  

즉, 내 방식대로 보거나 듣는다. 우리는 대상을 객관적, 있는 그대로를 결코 인식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생전 처음 보거나 듣는 것은 그것이 뭔지를 모르며, 심지어 '난 못 봤는데, 못 들었는데' 라고 합니다, 

이게 도대체 뭔 소릴까요?  '있는 그대로 본다'란 것이 도대체 무슨 말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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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그대로를 본다'  

우리가 세 살 어린애 시절로 돌아가서 세상을 보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기에 순수(純粹)하고 투명합니다, 

세상/ 대상을 볼 때, 자동적으로 갖게 되는 선입견,고정관념,마음자세를 다 내려놓고 마치 '처음 보듯이'

 대하는 것입니다. 이걸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천(千)에 하나, 만(萬)에 하나 있을까 말까 하다고 했습니다.

만약 있다면 그는 깨달음에 성큼 다가선 것이고, 실제로 그런 일이 가능하다면 그는 이미 깨달은 사람이다,

상에 대한, 나의 인식과 성격(自我)도 리셋(reset) 내지 포맷(format)해야 합니다,  안됐지만,

이쯤되면 이는, 이 세상의 글이 아니고 피안(彼岸, 판 밖)의 글인 것입니다,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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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것, 그 경우는 어떤 것일까?  (※ 이것이 '참 나'의 작동방식이다).

a.거울  b. 스크린  c. 물 표면

                     (禪家에서의 '海印': 잔잔한 바닷물 위에, 밤 하늘 둥근 달이 비추인 모습은, 마치 달 도장을 찍은 듯 함

a, b, c 에 비추인 것은, 속세가 부여한 일체의 가치 (오염: 色/선입견/편견/고정관념')가 떨어져 나간 것이다.

거울, 스크린에 비추인 것은, 실체가 아닌 형상(形象=헛 것=그림자)이로다, 

그 형상(形象)들은, 그냥 상(象, image)에 불과한 것인지라,

이쁘다/밉다, 더럽다/깨끗하다, 귀하다/천하다, 맘에 든다/안든다, 쓸모가 있다/없다 라고 하여,  

내 마음이 흔들릴 이유가 없다, 따라서, '반야심경'은 온갖 것들이 죄다 '없다' 라고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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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체의 가치/판단이나 평가의 잣대기를 다 내려 놓으라, 

'가치판단'을 하는 순간 시비/다툼/욕심이 일어나고, 내려놓으면 그것이 사라진다,

그냥 '뭣이 존재하는 구나' 하는 정도로 인식하라, 

내가 분별해 내는, 모든 세상살이의 '가치'를 무용지물로 만들어라 (판단의 終熄 - 테크닉이다)

모든 가치판단을 내려놓게 되면, 내가 '무장해제'를 당하는구나 하는 느낌이 들게 됩니다. 

물론, 도(道)를 닦는다고 해서, 세상살이를 남의 일 처럼/영화보듯이/건성건성/무색무취하게 살 수만은 없겠지요. 

'현실의 삶'으로 돌아와 어울리며 살아야 합니다.  然이나, 알고 사는 것과 모르고 사는 것의 차이가 있을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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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늘어남이 없다면 줄어듬도 없다 (不增이면 不減)

늘고, 올라간 것(增)을 보면 좋다/기뻐하고, 줄고, 내려간 것(減)을 보면 싫다/나쁘다고 한다. 

그런데. 이 둘은 어느 한 쪽만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늘어났다는 말은, 줄어들거나 그대로인 것이 

있기에 나온 말이다.  속담에 있는, '한 달이 크면, 한 달은 작다 (=큰 달, 작은 달)'도 같은 말이다,

맨 주먹이나 몸, 기운 따위를 '편다'는 것이 있으려면, 그에 앞서 쥔다, 움추린다'는 것이 있어야 한다,

한 측면에 열광하지 말라, 성적이 '늘었다'고 해서 너무 기뻐하지 말라, 그 다음은 '줄었다'일 터이니,

¶ "달도 차면 기우나니"... 보름달이 되면 그 다음은 이지러져 그믐달을 향해 가야 한다,

기업경영, 운동경기, 주식투자, 본인의 운세는 물론, 모든 대가(大家)들 한테는 너무나도 당연한

 얘기다. 저기, 산 정상에 올랐던 사람들이 웃으며 내려온다, 어찌, 내려오는 저들을 부러워만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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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존의 잘못된 해석: "늘은 것도 아니고 줄은 것도 아니다" (도대체 무엇을 그렇게 죄다 '아니다'라고 하는가? ) 

여기서 불(不)은 '없다'로 해석해야 합니다. 예: 不可知(=알 수 없다). 不可分 (=나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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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과 헤어짐, 또는 승리와 패배 등의 서로 상반된 가치는, 비례적이고 상대적인 것이다.

'잘 산다'라는 것은, 못 살아서 불편한 것과의 비교를 통해서, 사람들이 선호하는 것이다,

모두가 다 잘 살거나, 항상 잘 살고 있다면 그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어찌 알겠는가?  

그 반대로, 모두가 못 산다면 사람이 사는 게 다 그렇다, 그건 당연한 것이라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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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 새 것(나타남)의 '좋음'이 없다면, 헌 것(사라짐)의 '나쁨'도 없을 터이다 (不生, 不滅)    

 (c) 더럽다 는 것( ~새끼/놈)이 없다면, 깨끗하다 는 것( ~분/사람')도 없다 (不垢, 不淨)

양극단의 어느 한 쪽을 편애(偏愛), 혐오하지 말라. 곧, 자비심이지요,

그 '나쁨'(value)이 없었다면, 이 쪽의 '좋음' 도 드러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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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의 두뇌는, 세상만물(실체)을 인식할 때, 양극단(極端)과 이분법적인 가치판단을 동원합니다.  

그 중, 어느 한 쪽 만으로는 그 존재가치를 인식 또는 식별하지 못합니다. 즉,  

'좋은 가치'는 그 반대되는 '나쁜 가치'에 비춰 보아서(=조견 照見) 비로소 그 좋음이 드러나는 것이다. 

'크다'는 것은 '작다'는 것에 비춰보아야 그게 얼마나 큰 것인지를 알 수 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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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실체는 항상 그대로 '있다' (=山은 山, 물은 물), 그 실체에 붙여진 '가치(色)'가 그러하다, 따라서, 

'가치'는 반대가 있으나, '실체'는 반대가 없다. 즉, 男과 女는 상반될 지언정, 사람으로선 '같은 것'이다.

남(陽),여(陰)의 나뉨은 태극(太極)과 같고, '갖난 아이'는 그냥 '사람'일 뿐이니, 무극(無極)이로다,

우리는, 실체와, 그 실체에 붙어있는 다양한 가치들을 '같은 것'으로만 알고 있다(同一視),   

그러나, 그 둘을 떼어내 보자. 그러면, 대상에 붙어있는 선입견, 편견, 고정관념 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한 쪽'이 가치를 드러내려면, 반드시 그 '반대 쪽'의 가치가 (배경으로서)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의 그 유명한 '연기법'(緣起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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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연기법' 말고는 부증불감, 불생불멸, 불구부정을 한 세트로 엮어서 설명해 낼 방법이 없다,

천 오백 년, 장구한 세월 동안 '현장법사'의 반야심경을 마치 외계인 언어처럼 난문(難文)으로 만든 것은, 

선각들이 바른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안이했던 탓이다, '불(不)'이란 글자를 '아니다'로만 해석한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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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써, 자비(慈悲)와 연기(緣起)가 풀려나왔으니, 비로소 반야심경의 메시지가 드러난 것이다,     

부처님, 현장법사도 '시원하다' 라며 피안(彼岸)에서 염화시중의 미소를 지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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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앞서, 그 유명한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 나옵니다. 

色(가치있음)을 말할 때는 空(가치없음)이 바탕에 깔려있고(=시,), 

空(가치없음)을 말할 때는 色(가치있음)이 바탕에 깔려서(=시,是) 서로의 존재감을 드러내 준다,

색(色)과 공(空)이란 말이 추상적, 포괄적이었던 바, 예로 들었던 것이 바로, 

'부증불감, 불생불멸, 불구부정'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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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상반(相反)된 가치는 다 상보적(相補的)이다, 그 둘은 서로 분리해서는 존재할 수 없다.

색불이공(色不異空), 공불이색(空不異色)은, 가치있음(色)과 가치없음(空)은 서로 떨어질 수 없다 라는 뜻이다,

 동전은 앞, 뒷 면이 하나의 동전이다.  앞(前)이란 말이 없다면, 뒤(後)란 말이 존재할 수 있는가? (=不可分)  

위(上)와 아래(下), 오른 쪽(右)과 왼 쪽(左), 길고(長) 짧음(短), 멀고(遠) 가까움(近)이 모두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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꼴 보기 싫다고 해서 '부정적 가치'를 싹 쓸어 버리고 나면, 이윽고 '긍정적 가치'도 사라져 버립니다.  

적군이 소멸되면 아군은 더 이상 있을 필요가 없다, 서로 싸우는 적과 아군은 상보적인 관계로다,

아군의 존재가치는 적의 존재 여부에 달려있다. 이순신을 영웅으로 만들어 준 사람은 '풍신수길'이다, 

역사에 나온 '풍신수길'은 일본의 침략자일 뿐이다, 그러나, 이순신 개인(個人)으로선 얘기가 다르다, 

천상(天上)에서 그는 풍신수길을 만나서, "당신 덕분에 나는 萬古에 빛나는 英雄이 되었소이다,

만약 당신이 조선을 침략하지 않았다면, 나는 그냥 조선의 한 장수(將帥)에 불과했을 것이외다"

烈士, 義士가 된 유관순, 안중근, 윤봉길도 마찬가지다, 그와 반대로, 이완용은 역적(逆賊)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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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좋은 것도 자기들끼리만 있다면, 그 '좋음'은 가치를 드러내지 못하고 사라져 버린다,     

나쁜 것이 섞여 있을 때라야 비로소 '좋은 것'의 가치가 드러난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세상의 여자가 100% 똑같이 예쁘다면 '예쁜여자'라는 가치(=말)는 결코 드러날 수 없다,   

미인(美人)이 사람들의 주목과 칭송을 받으려면, 그 배경에는 못 생긴 여자가 깔려 있어야 한다,

(단, '여자' 라는 실체는 '늘 그대로' 있다.  단지, 예쁘다/밉다 라고 하는 '가치, 잣대기'가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쁘다,밉다 하는 관점이 없이 다시 본다면, 그 여자가 지닌 '다른 면'을 발견할 수 있다) 

어두운 바탕이라야 흰 글자가 또렷이 보이고, 밝은 해가 사라진 어두운 밤하늘이라야 달과 별이 보인다, 

우리는 '바탕'을 무시하고 외면해 왔다, 그러나 더 이상은 아니다, 이제는 '바탕'의 존재가치를 평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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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구한 날, 오로지 맑은 날씨만 있는 곳에서는, 그 '맑음'은 당연한 것이므로 아무런 가치가 없다,

흐리고, 비가 오고, 궂은 날씨가 많아야 비로소 '맑음'의 가치가 살아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쁘고 부정적인 가치들을 대할 때, 섣불리 '나는 싫다, 사라져라'를 외치지 말라,

그것은, 첫 째, 세상의 이치를 모르는 것이고, 둘 째, 상대의 원한을 사는 것이다, 

그 나쁜 것은, 반대 쪽의 것(=나 또는 보다 큰 틀)의 긍정적 가치를 드러내 주고 있는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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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이치를 모르고 '없어져라'를 주장하고, 

달면 삼키고 쓰면 뱉고 할 때 그것을 보고 '어리석다' 또는 '어린애 같다'라고 합니다.   

반대 쪽의 존재가치를 이해하고, 싫더라도 보듬는 지혜를 일컬어, 

부처님은 자비(慈悲), 예수님은 사랑( love), 증산은 해원상생(解冤相生)이라 하였습니다.      

신앙, 종교라 할 것 같으면 이것이 핵심 메시지이며, 그것 말고는 신앙(信仰)이라 할 것도 없다,

특히, 증산(甑山)의 '해원상생'은 무시됐던 '세상의 모든 부정적인 가치'에 대하여 

바른 자리를 찾아 준 것입니다. '더 이상 그럴 순 없다'라며 그늘에서 햇볕으로 끌어내 준 것이다,   

양(陽)과 갑(甲)의 세상에서, 음(陰)과 을(乙)의 원을 풀고(해원解寃) 상생하며 살라는 메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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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가성의 원리'를 예로 들었던 ​​성철스님은, 반야심경이 무슨 말을 한 것인지를 몰랐다,

마찬가지로, 절간에서 수행하는 스님들은 공연히 헛심만 쓰고 있다,  다른 스님들은 볼 것도 없다,      

인터넷을 검색해 봐도, 조계종의 표준해석, 위키백과, 큰스님, 석학, 천재, 허경영 같은 기인들도 

연기(緣起)를 '원인과 그 결과' 라는 식으로 '맹탕'인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연기의 바른설명이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반야심경 속에서 짚어내진 못했습니다, 

부처님의 '연기법'은 오랜세월 동안 잠을 자고 있었다, 불교의 반야심경은 그동안 죽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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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아무리 '안다', 깨달았다' 하는 사람이라 해도, 그것이 어처구니 없이 부실한 것을 봅니다.     

성철스님은, "천 삼 백만 전국의 불자,신도들에게 한 말씀 좀 해 주십시요"라는 記者의 간청에,

"내 말에 속지 말어"라는 말을 했습니다. 이건 또 무슨 말씀인가...?  그러나, 나는 그 말씀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내 말을 그대로 믿지 말어, 나도 잘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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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기법'은 사람들의 강팍하고 편협한 마음을 '누그러 뜨릴 수 있는 방편'을 얘기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 정도 납득했다면 '메시지'는 전달된 것이다, 더 깊은 경지는 '수행자-지도자' 들의 몫일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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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불가(佛家)의 금과옥조인 '해탈'을 설명합니다.

 

사람을 포함하여, 모든 생명체는 다 같이 '하나의 공통의식'을 바탕으로 살아가는 데, 이것을 일컬어,

참 나(眞我,主, 하나님)라고 합니다.  즉, 나의 생존의식은 길거리 개(犬)의 생존의식과 마찬가지다, 

지렁이, 식물도 마찬가지다.  모두 다, 심연(深淵)의 그리고 하나의 '근원의식'(알아 챔)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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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같은 의식을 공유하고 있다 리는 것을 깨달으면, 모든 생명체를 귀하고 끔찍이 여기게 됩니다.  

 

'참 나'(眞我)가 있다면 '가짜 나'가 있을 터인데, 그것이 바로 '자아'(自我, 假我)란 것입니다.  

동,식물도 사람만큼은 아니지만, 일정부분의 '자아의식'이 있을 터이다. 

즉, 성장환경, 주변의 자극으로 인해서, 조건화되고 특성화 된 개체 생존의식이다,      

 

'자아'(自我, 에고ego)는 '나' 이다,  그런데, 그것을 '가짜 나'로 보아야 하는 까닭은

'가변적'(可變的, changeable)이기 때문이다, 즉, 매일매일 새롭게 다시 태어날 수 있다,   

도(道) 닦는 사람은, 그 '가짜 나' ('참 나'로 부터 떼어낸)를 마치 목수가 연장쓰듯 할 수 있어야 한다, 

'가짜 나'를 죽이는 일, 즉, 세상에 대한 온갖 고정관념을 지우는 것을 '해탈'(解脫)이라 합니다,  

따라서, 해탈은 '참 나'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양파껍질 같은 '가짜 나' 를 한 꺼풀씩 벗겨내면 

드디어 심연의 근원의식인 '참 나(하나님)'와 마주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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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 를 죽인다?  

도 닦는 사람은, 지속적으로 또 철저하게 자아를 죽여야 합니다. 즉, 세상사물에 대한 

나의 '고정관념(때, 오염)'들을 씻어낸다는 뜻에서 '닦는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나의 모든 것을 다 버렸다' 라는 최소한의 경험조차 없다면, 덜 닦았거나 가짜 도인(道人)인 것이다, 

예수님도 '죽음을 맛본다'(taste death)라고 말씀했습니다.  죽음을 '맛 본다'...? 

이는, '참 나'에서 분리해 낸(즉, 내가 나를 낳은; bring forth) '자아'를 무효(無效)로

만드는 일 이기에, ​'죽음을 맛 본다'라고 하면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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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자아를 버리고 건너 간 피안(彼岸)의 언어인 즉,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를 닦아서 번뇌,망상,고통,괴로움을 털면서, 매일매일 새로운 삶을 맞이하시라!

그것이 깨달음, 해탈이다,  이는, 예수님이나 부처님이나 다 똑같이 말씀하셨다,

*해탈을 해도 속세의 삶은 계속됩니다, 닦으면 더러워지고 그러면 다시 닦는 일을 평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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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를 과거의 나쁜경험으로 대하면 죽이는 것이 되고, 새롭게 보아주면 살리는 것이 됩니다.

과연, 나는 상대방을 얼마나 용서해야 할까? '일곱 번' 용서하면 되나요?  예수님은, '일흔 일곱 번 용서하라'고

말했다. 이는, 그런 숫자가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한 '무한한 자긍심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 자긍심(自矜心): 그 일이 실로 마땅하다 고 여기는 믿음, 상대방이 태도를 바꾸건 말건 괘념치 않는다,

 

'자아-가짜 나'를 버릴 때에는 '차라리 날 죽여라'하는 느낌이 듭니다.    

도(道)를 닦는 일은, 선각(先覺)의 인도를 받아, 자아를 버리는 과정이며 해탈하는 과정입니다.

해탈은 죽는 일이 아니다,  세 살 이후로 나도 모르게 쌓아 놓은, 이 세상에 대한

온갖 고정관념과 편견을, 하나 씩 둘 씩, 연기법으로 해석하면서, '참된 인식'*(=자비/사랑)'으로 

다시 태어나는 일(=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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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可貴天然物 獨一無伴侶 覓他不可見 出入無門戶

          捉之在方寸 延之一切處 爾若不信受 相逢不相遇"      

- 중국 당나라 때 문수보살의 화신이라 여겨긴 道人, 寒山의 詩 -


참으로 귀하여라, 천연물이여, 오직 하나이니 짝할 이 따로 없네(=하나님)

그는 찾아도 보이지 않고, 나에게 드나들지만 문이 없다네

안에서 찾고자 하면 마음 속 이요 밖에서 찾아보면 온 천지에 다 있네

(=천국은 네 마음 속에, 네 마음 밖에 있다,  도마복음)

그대가 받아들여 믿지 않는다면, 마주친들 알아볼 수 없으리.

'참 나'를 인간의 언어로서 표현한 것이다, 

만질 수 없고 보이지도 않는 존재인 하나님을, 마치 허공을 그림에 그려 내듯이,

형용하기 버거운 것을, 글로 그린, 한 폭의 그림이라 하겠다.  -인산죽염 계승자 김윤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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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반야심경은 천부경처럼 코드(code)화 된 난문(難文)이라서 지금까지 세상에 없던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제 비로소, "부증불감, 불생불멸, 불구부정"이 '연기법(緣起法)과 자비사상(慈悲思想) 얘기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아, 역시 그거였구나! 그거 일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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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종(불교종단)에선 연기(緣起)를 '앞서는 원인과 그 결과' (=時間的 緣起) 라는 식으로 달리 규정하나,  

그리하면 그냥 '상식적인 얘기'인 것이다, 그처럼 함량미달의 소리를 해도 지적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반야심경에 씌여있는 '이것이 바로 최고의 지혜이니라' 라는 말에 얼마나 부합하나요?  

 당연히, 자비(慈悲)사상을 끄집어 낼 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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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조계종의 '표준해석'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슨 소린지 알아 먹을 수가 없다, 

이 지경이니, 기독교/가톨릭과 마찬가지로, 불교가 (삶의 힘이 되질 못하고) 껍데기만 남았다는 것이다,

성철스님의 그 동영상 덕분에 (비록 스님이 잘못된 비유를 들었지만, 암튼) 반야심경은 이제 새롭게

태어났다.  인류의 (집단)깨달음도 성큼 다가왔다. 2020년은 그렇게 스릴(thrill)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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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심경에 보면, 늙고(老) 죽음(死)반야심경에 보면, 늙고(老) 죽음(死)도 없고, 일체의 고통과 집착도 없다,

'그 모든 것이 다 없다'...라고 한 말은, '연기법'으로 해석을 해야만 비로소 그 문맥이 통합니다.
늙음, 죽음 이란 것은 엄연한 실체(실체)요 자연적인 현상이다,  그런 일을 왜 '없다' 라고 하였을까?  

'연기법'으로 老와 死를 관(觀)하면, a. 늙으니까 쓸쓸하다 서럽다 비참하다 라고 하거나,

b. 죽는다 는 것이 무섭다, 한스럽다, 억울하다, 애통하다 라는 가치(생각)도 달라질 터이다, 

노(老)와 사(死)에 얹혀있는 부정적 가치(=나쁜 생각)는 사람마다 제각각일 터이다(=제법무아)     

늙고 죽음은 추하고 비참한 것이란 생각이 있는 반면에, 자연스럽고 인생의 원숙한 경지 라는 생각도 가능하다,

이런 理致를 받아들인다면, 흔히들 생각하는 것과 같은 '그런 늙음'(老)과 '그런 죽음'(死)은 없다...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