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삶과 업장, 여자 몸의 수난사

참 나 2012. 5. 4. 23:03

 

인류, 사람...은 저마다 다른 시대환경, 국토와 사회, 조상, 전생 등 저만의 독특한 배경을 갖습니다.  

나쁜 짓을 했거나, 빚을 진 영혼은 그 댓가를 자신이 치루고, 갚아야 합니다. 선행, 공덕을 쌓았다면

내가 그 보답을 받는 것이 또한 합당합니다. 

 

제삼자는 말할 것도 없고 겪는 본인조차도, 내가 전생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런 일을 겪는가, 또는

무슨 공덕을 쌓았기에 이런 행운을 누리는가...그걸 모릅니다. 삶에서의 시련이나 치명적인 경험 또는

부귀영화...나의 현실을 돌이켜 살핀다면, 내가 전생에 뭔 일을 (안)했는지 짐작해 볼 순 있겠지요.  

 

사람은 '자기의지'로 삶을 영위합니다. 하여, 그에 따른 보상과 책임도 그 사람의 몫이란 것이지요. 

지금의 내 일거수 일투족은 다 나의 몫이다, 문을 연 사람이 문을 닫듯이... 혼잣말로 중얼거린 것도

내가 책임져야 한다, 내가 더럽힌 건 내가 닦아야 하고, 내가 묶은 매듭은 내가 풀어야 한다, 안하면?

내 후생에 해야합니다. 누군가 '업'이 많다는 것은 해결하지 않고 뒤로 미룬 것이 많다는 얘기입니다.      

 

길 가는 저 사람이 겪고 부닥친 현실은 그 사람의 현실일 뿐, 내 현실과는 당연히 다르다는 것입니다.

(섣불리 나도 그럴 수 있다...생각하는 것이 과한 것입니다) 내가 치뤄야 할 삶은 당연히 그와는

다르고 또 그래야만 합니다!  의연하게 그렇게 믿고 살아야 합니다.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일말의

동정, 연민 또는 선망의 감정은 있다 하더라도, 각자의 불행, 행운 등은 제삼자가 모르는 선후 관계가

따로 있다...그렇지 않다면 '새옹지마'란 말도 없어야 합니다. (국가, 사회, 조직, 이웃과 함께 풀어야

할 업보나 또는 같이 누리는 행운...물론 그런 일도 있겠습니다) 

 

여자의 몸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 남성의 시선을 좇아서 유행, 관습이라는 이름으로 늘 재단을 당해왔다.

아프리카 모 종족은 목에 고리를 겹쳐넣어 여자의 목이 최대한 늘어지게 만들고 그걸 예쁘다고 한다

또 어떤 종족은 여자가 어린시절부터 입술에 둥그런 틀, 접시같은 것을 끼워넣어 그게 클수록 좋아한다   

과거 중국에선 전족이라 하여 자라나는 여자 아이의 발을 죄어서 조막만하게 만들고 그걸 예쁘다고 했다

한국에선 무슨무슨 사이즈...라고 해서 삐쩍 마른 여자의 몸매를 환호, 선망의 대상인 탓에 멀쩡하니

못 먹는 거식증이란 병도 있단다. 뚱뚱해서 뱃살을 가위로 자르고 싶다는 여자도 봤다...키가 작으면

사지연장 수술도 받는다.  지나간 영화에서 보면, 미국에선 처녀한테 코르셑을 무리하게 입히느라 시중드는

아줌마가 애를 먹는 광경도 보인다. 예나 지금이나, 살찌고 키 큰 여자는 섹시하지 않다 하여 치한들에게

조차 인기(?)가 없다.  일본 남자들 또한 귀여운 이미지를 선호한다며, 씩씩한 모습은 무섭다 라고한다... 

 

"하나의 '미적기준' 을 토대로 여자의 전신을 깎고 조이기를 요구한다...이게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미인대회는 또 어떤가? 이렇게 인위적으로 사람의 위계와 서열을 지으며 어찌 평등평화를 외칠 수 있으랴?

철학자 하이데거 (및 들뢰즈, 데리다, 푸코, 라캉..등)가 지적한 대중사회, 산업사회의 불행이란 것도 이런

맥락이다.  대중, 타인의 요구에 따라서 존재하는 나, 그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두려워 하는 나...

어떤 개념하나를 밥상에 올려놓기 위해, 그 외의 다른 것들은 무시해온 역사가 바로 '지식의 역사' 이고

넓게 보면 모든 것의 역사다...'표준화' 란 것은, 주류가 주변(타자)을 걸러내는 고상한 폭력행위다.

제도권 지식권력들이 사회의 마이너들에게 가하는 폭력과 격리가 얼마나 암암리에 사회 안에 깊이 침투해

있는가.. 이 모든 것들이 다 보편성, 질서를 빙자한 주류의 횡포, 인위적인 칼 질, 재단질인 것이다...

(경향신문 스크랩 일부 인용)

'지금 그리고 여기에 존재하고 있는 것은 모두 다 마땅하다'...는 관점이 프랑스인 철학자, 미셀 푸코 입니다.

패러다임의 전환, 통합적 사고, 통섭 운운 하는 것이 이러한 철학적 바탕에서 출발한 것으로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