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察人事

내가 대접한 대로 받게 될 터이니...

참 나 2004. 7. 2. 16:18

이렇게 한번 생각해 보자.
내가 일상에서 대하는 사람,물체들은 제 멋대로 나한테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빚은 형태로 나 한테 다가온다, 

사건은 늘 벌어진다.  나는 거기에 관심을 기울인다. 불필요한 일인데도 굳이 보거나 들으려고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안 보거나 안 들은 것으로 할 수도 있는데...심지어 남이 나를 건드렸다고 해도 그런 일이 없었던 것으로

처리할 수도 있다.  나는 지하철에서 이런 일들을 심심치 않게 겪는다.

오래 전 겨울 날, 한산한 지하철에 앉아서 가고 있는데 그만저만한 남자가 다가오더니 손으로 내 얼굴을 다짜고짜

쓰다듬는다, 나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무시해 버린다, 

다른 경우,  아침 출근시간인데 전날 먹은 술이 안 깨었는지 옆자리에 앉은 녀석이 내 무릎 위로 상체를 쓰러뜨린다

몹시 불쾌하다, 그렇지만 역시 무시해 버린다.  

그 외 괜히 툭툭치는 사람, 졸면서 몸을 가누지 못하는 사람, 멀찌감치서 집요한 시선을 보내는 사람...

그 무슨 사연들인지 그렇게 나와 접촉을 원하는 경우, 나는 주변에 먼지 하나 안 일으키면서 이들을 무시해 버린다. 

무시하면 그 상황은 그냥 없던 일로 치부되고, 세상은 고요하다. 물론, 계속해서 나를 괴롭힌다면 나는 완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내 몸을 지킬 정도의 운동은 하고 있다.

그와는 반대로, 일상의 일에는 의식적으로 관여해야 한다. 

결코 놓고 보는 듯한 태도, 관찰만 하는 입장이 되지 말자.  내 존재, 내 의견을 input 하자.    

내가 모르는 사람은 구태어 상관할 필요가 없다, 내가 아는 사람, 평소에 상대했던 사람, 그 얼굴들은 

내가 빚어낸 작품에 다름 아니다. 그들은 평소 내가 대접한 사람들이다. 나는 내가 한 만큼, 꼭 그 만큼의

대접을 받을 것이다.  내가 건성건성 대했다면 나는 대접을 받지 못할 것이다.  


「예수」의 황금율(黃金律);    

  '너희가 대접을 받고자 하는 만큼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정리하자.
나 한테 친절한 사람은 내가 잘 대해 줬기에 친절한 것이다. 나한테 소홀히 대하는 사람은 내가 그렇게 했기에

저러고 있는 것이다. 

「지두 크리슈나무르티」는 '삶이란 관계맺기' 라 하였다.  
내가 평소에 남을 대하는 방식, 관계맺는 방식, 그것이 바로 지금의 내 현실다. 

내가 관찰만 하고 있어서는 나한테 어떤 일도 생길 리가 없다. 

내가 관여함 (add my weight on it...)으로서 비로서 세상이 나에게 그 어떤 의미로 다가오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