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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不立文字, 敎外別傳, 直指人心, 見性成佛 」 이 글자가 전하는 메시지는 과연 무엇입니까? 남이 한 설명이 아니라, 자신의 언어로, 예를 들면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겁니다. 以下 2020년에 初見(性) 하고, 2026년에 增得한 제가 설명하겠습니다. 먼저, 해당 문자의 직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 불립문자(不立文字): 경전 등의 글을 본 것만으로는 깨달음을 이룰 수 없다 - 교외별전(敎外別傳): 가르침으로 (깨달음을 온전히) 전할 수도 없다 - 직지인심(直指人心): (저 하늘이 아니라) 마음자리, 그곳을 직방으로 겨냥하라. - 견성성불(見性成佛): 그리하여, 내 안에서 '참 나'(=하느님)를 발견하고 '깨달음'을 얻을지니라.
경전 만으로는 깨달음을 얻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종교단체나 스승/어른들의 가르침만으로는 깨달을 수 없다, 그러하니, 오직 내 마음(자리)에서 '참 나(=하느님)'를 찾아야 하느니라. 이어서 '깨달음이 올 때까지' 정진하라!
그렇다면, 왜 경전 등의 책이나 가르침만으로는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 고 하였는가? 그 이유를 설명드리겠습니다. 우리의 두뇌에는 (세상) 사물이나 (남의) 생각을 받아들이는 기왕의 '인식 체계'가 존재합니다. 그것을 고정관념, 선입견, 편견이라고 부르며, 이는 '컴퓨터 프로그램, 어플' 처럼 작동합니다. 내가 보고(視) 듣는 것(聽), 맛을 본다거나 손으로 만지는 일체의 지각(perception)은 두뇌(어플)에서 해석을 거쳐야만 비로소 '이것은 무엇'이라고 인식하게 됩니다(=認識이 이루어짐). 쉽게 말하면, 학습을 하거나 지각을 하는 일체의 것은, '이미 아는 것(=旣知의 것)을 바탕으로 두뇌가 종합하고 해석한 것을, 내가 인지(認知)하는 것이란 말씀입니다.
그런데, '깨달음' 이란 것은, 듣도 보도 못한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얘기입니다. 이 세상살이 '판 밖의 것'입니다. 따라서, 이처럼 어색하고, 기존의 것과는 정반대 얘기를 내 두뇌는 수용할 수 없습니다. 시쳇말로 죽었다 깨도 모릅니다. (*예수님 성경 말씀에, '어리석은 자는 맷돌에 넣고 찧어도 그 어리석음의 껍질을 벗겨내지 못한다') 본인이 '애쓰고 노력한다'는 것도 어디까지나 한계가 있다,
그러므로, 인류의 오직 극소수가 깨달음을 얻는 것입니다. (하늘이 주니까 내가) '얻는다'라고 표현합니다. '깨달음'이란 것은 붕어빵 틀로 찍어내듯 할 수도 없습니다. 佛家에서는, 연례행사로 동안거/하안거/수도 행위를 하고 있지만, 한 사람의 각자(覺者)도 배출해 내지 못합니다. 깨달음은 수행인 중에서도 예외적으로 찾아드는 희귀한 것입니다. 발심(發心)하고 나섰다 해서 되는 일이 아니다, 성직자 등이 일상으로 하는, 기도나 전례 의식은 '습관적 반복행위'일 뿐입니다. 거기에는 아무런 새로움이 없으며, 그것은 깨달음이나 수행이 아니라 자아(Ego)의 강화일 뿐입니다(Jidu Krishnamurti).
우리가 보고, 듣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은, 두뇌가 '기존의 지식에 입각해서' 해석을 함으로써 비로소 인식을 하게 됩니다. 따라서, 두뇌에 없는 새로운 지식과 정보는, 내가 소화(=이해) 할 수 없습니다. 이런 모습(=컴퓨터의 먹통과 같은 것)을 가리켜서, '보고도 못 본 것'(視之不見 시지불견 = 눈 뜬 장님), 듣고도 못 들은 것(聽之不聞 청지불문)이라고 한 것입니다. 따라서, 스승의 가르침이나 경전의 글만으로는 '깨달음'을 얻을 수 없으므로, 이를 가리켜 '불립문자, 교외별전'이라 하였습니다. (소 귀에 경 읽기, 바위에 물 주기...비난이 아닌 기능 부재)
註: a. 視之不見 聽之不聞 < 道德經 14章 > b. 視而不見 聽而不聞 食而不知其味 < 大學 7章 > c. Go to this people and say; you will be ever hearing but never understanding. You will be ever seeing but never perceiving. <사도행전 ACTS 26> 이상과 같이, '성인의 진리'는 특정 종교를 떠나서 다 같고, 한결같습니다.
'이 시대 '마지막 스승, Jidu Krishnamurti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1895~1986)의 저서, '자기로부터의 혁명' <凡友社 1983, 권동수 譯. 1983 문공부 추천 도서>은 처음부터 끝까지가 다음 '한 문장'으로 요약됩니다. 즉, '旣知의 것'으로는 '未知의 것'을 이해할 수 없다' 이 말은 '불립문자, 교외별전'과 같은 뜻입니다. 위 제목에, 제가 '增得 했다"라고 쓴 것의 실제 내용입니다. 그 책은 제가 40여 년 전에 구입해서 몇 차례 읽었으나 뭔가 가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깨달음'을 얻은 후, 이제 다시 돌이켜 보면서 활연관통(豁然貫通)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도 이런 얘기들을 이해한다면 '깨달음'에 성큼 다가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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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그렇다면 '깨달음'은 (과연) 어떻게 얻을까? 내가 살아오면서 겪은 온갖 지식/정보는, 내 두뇌 속에 '기지(旣知)의 것'으로서 꽉 차있습니다. 그것들을 바꾸고 비워내야만 합니다. 대저, '좋은 것...'이라고 하는 가치들은, '나쁜 것...' 내지 '별것도 아닌 것...'이 (의식)밑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에 비로소 존재감이 드러나는 법(=緣起法)입니다. 또, 세상에 '흔해 빠진 것...'이 (의식)바탕에 널려있음으로써, 귀한 것...'이 가치를 드러내며 대접받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치(理致: 연기법, 상생, 자비, 사랑의 본 뜻)를 알 때, '깨달았다'라고 합니다. 모든 '긍정(肯定)...'은 '부정(否定)...'의 바탕 위에서 드러난 가치판단이란 것을 알아야 합니다.
좋다 vs 나쁘다, 귀하다 vs. 흔하다, 긍정적 vs. 부정적...이런 것들은 어느 한 쪽만으로는 '절대가치'를 가질 수 없습니다. 절대적 가치는 존재할 수 없고, 오직 상대적 가치만 존재할 뿐입니다. (=The opposite defines each other. Contradictory is complementary!) 절대적 가치란 존재하지 않는다 라고 하면, 여기에 숨은 메시지는 무엇인가? 산해진미, 맛있는 것만 늘 먹게되면 이내 그 맛있다는 음식의 가치도 '평범한 것'이 되고 마는 이치를 말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맛없는 것도 쓸모가 있다'고 하는 그 '이치(理致)밖의 이치(理致)'를 주목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증산이 말한 '판 밖의 공부'입니다. '상보성(相補性)이며, '공(空)사상' 입니다. '맛없는 것'도 문득 존재가치가 생기는 것이 바로 증산(甑山)의 '해원상생(解寃相生)' 입니다. 자비, 사랑이라고 하는 위대한 사상의 의미도 그것이었다, 반야심경의 '색즉시공, 공즉시색'은 바로 그 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 사람들은 (깨달음의) 근처까지만 가셔라; 실천은 어렵더라도 무슨 말인지 이해는 하고 있으셔라! 그 이상은 '하늘의 사명'을 받은 사람만이 가능한, '지난(至難)한 길'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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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글은, 쓰고 나서도 수 십 차례 고치고 또 다듬었습니다. 이러한 정성은 사명감입니다. 저는 유, 불, 선 三敎의 眞理 지향점이 같음을 관통했으며, 이는 역시 성경의 예수님 말씀, 강증산의 해원상생, 서양인 Peter Erbe(著書: God, I Am), 지두 크리슈나무르티의 통찰과도 일치합니다. 그러므로, 저의 깨달음(연기법 설명)은 의심하거나 반박의 여지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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