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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 최초로 드러난 '반야심경'(연기법); 한글 평문 해설

참 나 2020. 4. 10. 22:22

 

 '이거 도무지 모르겠다'...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번쯤은 읽어 둬야 합니다.

 

 만약 내가 잘못 짚었다면, 반야심경은 앞으로도 영원히 묻혀 버리고 말 것이다!

      1,500년 전, 현장법사의 반야심경이 나온 이래, 이것처럼 독창적인 해설은 처음입니다.   

 

【般若心經】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蜜多時 照見 五蘊皆空 度一切苦厄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舍利子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한글 평문 해석】 

'관자재보살'이 반야바라밀다의 지혜를 실천할 때, 

몸(두뇌)이 지어내는 '모든 것을, 그 반대 짝에 비춰 봄으로서 삶의 고통으로 부터 벗어났느니라.

사람들아, 가치가 '있다'고 하는 것과 '없다'고 하는 것은, 그것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니라. 

가치가 있는 것은, 가치가 없는 것이 바탕(背景)이 되어 주기 때문이요, 그 반대도 역시  

마찬가지다,  몸(두뇌)이 보고, 듣고, 느끼고, 행하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다 그러하다, 

사람들아, 모든 것은 자신 만의 '절대가치'로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다음과 같이 말하노라. 

  - '생겼다' 라는 생각(=가치)이 없다면 '사라졌다' 라는 생각(=가치)도 없다 (不生不滅) 

 - '더럽다' 라는 생각(=가치)이 없다면 '깨끗하다' 라는 생각(=가치)도 없다 (不垢不淨)

  - '늘었다' 라는 생각(=가치)이 없다면 '줄었다' 라는 생각(=가치)도 없다    (不增不減) 

¶ 漢字 辭典에 나온 不:  ① 아니 不  ② 없을 無.   用例: 不可分 (=나눌 수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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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물만상의 '가치(=色)'는 그 반대가치(=空)와 더불어 인식되는 것일 뿐이다(=色卽是空 空卽是色) 

즉, 모든 가치(價値,value)는 오로지 '상대적 가치'일 뿐이고, 

'실체(實體, body)'는, 그 가치와는 상관없이, 스스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반대가치(空/色)를 없애려 들지 말라. 반대 짝을 없애버리면 내 가치도 없어진다 (¶ 토사구팽의 例)

쓸모없다,나쁘다,더럽다,못생겼다...처럼 상반(相反)된 가치(contrary value)라 하여 그것을 

제거(除去)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을 때, 이를 일컬어 "자비, 사랑, 상생이라 하는 것입니다    

부처의 '자비(慈悲)', 예수의 '사랑', 증산의 '상생(相生)'은, 그 근원(根源)이 '연기법'으로서, 同一한 사상입니다,   

 

위에 인용된 '세 줄'이 핵심이고, 반야심경의 나머지 아랫부분은 그 부연설명에 해당합니다. 

조계종 표준해석, 달마대사, 청담스님의 해설은 한결같이 잘못 짚었거나, 못 미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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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생불멸,불구부정,부증불감'을 위와 같이 해석해야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뭔가 어렵고 난해한 것을 설명하려면, 

"~이 아니다" 또는 "그게 아니다"하고 끝낼 수는 없다('그럼 뭔데?' 라는 질문이 생김)

 '~이 아니다' 라는 말은, 부정이나 해명을 하는 궁색한 표현인 것이다. 

제대로 설명을 하려면 "~은 이런 것이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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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佛家)를 비롯하여, 사람들은 '불생불멸,불구부정,부증불감'을 어떻게 해석해 왔는가?

'태어나지도 사라지지도 않는다...(?)' 그것이 잘못된 해석이다.  왜냐? 

'不'을 한결같이 '아니다'로만 보았다. 그러나 여기서는 '없다'가 되어야 '깊은 뜻'이 살아난다.

 

첫째, 고작 '무엇 무엇이 아니다' 란 말을 하려고 했을까? 즉, 부처의 핵심 메시지인 '연기(緣起), 자비(慈悲)'와는

아무런 관련성도 찾을 수 없는 맹탕인 것이다.  따라서, '무엇 무엇이 아니다' 란 해석은 잘못이고, 틀린 것이다.       

 둘째, '생기지도 사라지지도,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늘지도 줄지도 않는다'...란 해석이라면,  

빈껍데기 말인 데, 그걸 보고서 어찌 '최고의 지혜'라 할 수 있겠는가?   

셋째, '공(空)의 모습은'(是諸法空相)하고 운(韻)을 뗐으면, 그 다음엔 바로 '이런 것...'이 나왔어야 맞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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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물이 공(空)한 모습(是諸法空相): 이는 어디까지나 공(空)에 대한 설명이며, '참 나'를 설명한 것이 아니다.  

        청담스님은 '불생불멸...'의 낙처(落處)를 얻지 못하여 고심 끝에 '참 나'를 원용(援用)했으리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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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아무도 이해(理解)를 못하는 '반야심경'은 있으나 마나한 것입니다, 

이른바, '최고의 지혜'란 것이 인류의 행복증진에는 하등의 기여를 하지 못했으니 딱한 노릇이다. 

'현장법사'의 '반야심경'은 부적, 주문으로 쓰는 것 말고는 실패작 이었다.   

'삶의 고통에서 벗어났다' 운운 하는 것도 공허한 얘기다,  

'반야심경'을 읽고서 한 사람이라도 고통에서 벗어났을까요? 뭔 소린 지도 모르는데...ㅠ

 

이제, 그 빛 바래고 낡은 도그마(dogma, 敎理)를 180`반전시켜야 합니다.  즉,

"고통과 괴로움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칠 것이 아니라, 그와 더불어 기쁨과 즐거움을 느끼며 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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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고통과 괴로움이 없이는 살 수도 없으려니와, '고통'이란게 반드시 나쁜 것만도 아니다,

일상의 크고 작은 고통과 아픔을 극복해 나갈 때, 기쁨(날아갈 듯 개운함)도 느끼게 된다, 

'일병장수(一病長壽)'란 말은, 한 가지 병(病)을 갖고 살 때 오히려 오래 산다 라는 뜻이다,

¶ 퇴계 이황 1501~1570은 고희(=人生七十古來稀)를 말하던 시절에 늘 골골하면서도 '일흔 살의 천수' 를 누렸다.

'단칸방' 신혼살림이 비록 초라하지만, 하나 둘 살림이 늘면서, 즐거움이 새록새록 생겨난다.

"아무런 괴로움과 불편함을 모르고 사는 삶에서는, 기쁨과 편안함도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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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 글은 비교적 읽기가 쉬울 겁니다.

이로써, 천 오백 년 동안, 어둠과 먼지 속에 묻혀만 있던 '반야심경'의 메시지가 드러났습니다. 

그간 연기법과 공(空)에 대해서 많은 이들의 강연, 설명이 있었으나, 그 누구 하나 '아는 사람'이 없었다,  
善知識, 큰스님, 碩學, 敎授, 道士, 法師, 그들은 정각(正覺)을 이루지 못하고 혹세무민한 것입니다.

세상 일이란 다 선입견,편견,고정관념의 소산(소산)이요, 주관적'인 것이다(一切唯心造: 華嚴經)

고정불변이 아니라 가변적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내 문제(고통)의 해결은 내 생각을 바꾸면 되는 것인데,

사람들은 그것까지도 이미 알고 있습니다, 본질은 '내 생각을 바꾸기 싫다'라는 데 있다. 자존심 때문에...

그리고는 상대방 보고 '니 생각을 바꾸라'고 합니다. 모든 법문은, '자아(自我)를 죽이라'고 하였다, 

자아를 죽이면서 비참함과 열패감을 맛보라는 얘기가 아니라, 잘못된 자아를 해체해 버리고

다시 태어나라는 것이다, 더 큰 틀에서, 큰 자아를 형성(浩然之氣)하고, 자긍심을 갖고 살라...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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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적어도 쉰 번(50회)은 손질을 했습니다. 공력과 정성을 다 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리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