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반야심경의 '불구부정,부증불감,불생불멸'이 어떤 맥락의 말인지 잠깐 의심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궁금하던 차에 '인터넷 검색'을 다시 한 번 해 봤습니다.
예상했고 이미 알고 있던 대로, 위키피디아,나무위키,유명 절간의 웹사이트 등에서는 헛소리,불완전한
설명뿐 이었다. 천 년 전 부터 거슬러서 당대의 최고 선사들이 했다는 설명도 별 도움(영양가 없음)이
안되더라, 인터넷 검색을 했거나, 절간을 찾거나, 연구하는 사람들이나 모든 이들이 다 실망했으리라.
반야심경의 공(空)을 제대로 설명한 사람이 없구나, 나름대로 어디서 들은 풍월을 읊고 있을 뿐이로다
(그렇다고 해서, 모르는 것이 당연하다는 식의 나태함도 정당화 될 수 없다) 예로 부터 현재에 이르는
선지식들이 모두 힘을 합쳐도 이 문구는 아직 정답이 나온 것이 없구나, 그러니까, 불교계의 그 모든
지식을 섭렵했을 당대 스타 반열의 불교계 강사, '법륜 스님'도 저렇게 헛다리를 짚었겠지.
그 '법륜스님'의 동영상 강의 (제목 동일), 시리즈당 40여분 짜리, 처음부터 십 몇 편 까지를 보았습니다.
많은 부분 즉, 불교지식, 배경과 사례, 비유들이 예의 차분하고 자상한 설명으로, 비불자(非佛子)지만
불교체계에 관심이 있는 나 같은 사람한테 도움이 되었습니다. (아, 그게 그런 얘기였구나...!)
그랬는데, 시리즈 후반 부에 드디어 '부증불감' (늘어나지도 줄어드는 것도 아니다...)이 나오는 겁니다.
법륜 왈, "비행기 승객이 기내에서 밥을 먹었다고 비행기 무게가 늘어나는 것이 아니다, 또, 밥을 먹은
그 승객들이 화장실 가서 일을 봤다고 해서 비행기 무게가 줄어드는 것이 아니다" 식으로 설명을 하는
겁니다. (그건 아니다! 큰 실수를 하는구나, 법륜도 모르고 있구나!)
비행기 무게, 모든 무게 는 수치(ton, kg)로 나타낼 수 있다. 무게가 늘고 주는 것은 객관(客觀)의 세계다,
그것은 혼란이나 논란의 여지가 없습니다. '법륜'은 비유를 잘못하고 있는 것이다,
한 자락 삐끗했다고 해서, 뭐 그정도 쯤이야 하고 넘어갈 일이 아닙니다. 이는 오로지 알음알음(지식,논리)
만으로 반야심경을 대하고 있다는 증거다, 자신의 깨달음을 바탕으로 '반야심경' 꿰뚫고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아직 못깨달았음을 노출한 것이다, (반야심경을 잘못 해설했다고 한들 누가 감히 그것을 지적할 수 있으리?)
그와 유사한 예로, 사람이 몸무게를 잴 때, 오른 손에 들었던 무거운 물건을 왼 손으로 옮겨 들었다 해서
저울의 수치가 변하지는 않는다, 그게 '부증불감'이다...(?) 이게 무슨 헛소리입니까? 단지 그런 단순한
얘기일 뿐이라면, 우리가 거기서 무슨 큰 지혜를 얻겠습니까? 하나 마나한 맹탕인데...어찌 그 정도의 것을
'지혜 중에서도 으뜸가는 지혜' 라고 하겠는가?
아는 것은 알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 부족한 것은 아직 부족하다, 더 연구가 필요하다 라고 말해야지요,
그래야 그 외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는 신뢰감을 주는 겁니다. 거짓말, 잘못된 비유로 넘어가려 한다면,
그 설명은 차라리 안듣는 것 보다도 못하다, 법륜 스님의 죄(業)가 크다,
부증불감...을 설명합니다.
"세상의 것들은, 사람의 의식이 닿기 전 까지는 '그냥 있는 그대로의 그것' 일 뿐인데 (산은 산, 물은 물)
사람들이 거기에 붙여 놓은 이런저런 '가치'(value)가 마음을 어지럽히는 것이다, 그 '가치'(色)라는 것은,
모두 '불변의 실체'가 아니다(不), 오직 인위적인 것(空)일 뿐이다, <마음 먹기 나름, 해석하기 나름...>
'사람은 생각하는 갈대' (파스칼, B. Pascal, F. 1623~1662)' 라고 말했듯이, 사람의 생각이 늘 문제로다,
따라서, 사람보다 생각이 덜한 (아주 없지는 않은!) 동물은 세상을 대할 때 비교적 '있는 그대로' 볼것이다.
사람은 사물(대상,실체)을 볼 때, 절대로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합니다. 반드시 색안경을 쓰며, '가치'를 따진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래기도 한다, 더럽다거나 깨끗하다, 싫다거나 좋다, 높다거나 낮다 하며
대상에 어떤 '가치(value, 色)'를 부여한다, 그것들은 모두 선입견, 편견인데 오직 사람만이 그런 짓을 한다,
'더럽다, 깨끗하다(不垢不淨)', '늘었다, 줄었다(不增不減)', 생겼다, 없어졌다 (不生不滅)고 하는 일들은
사람의 인식 (두뇌에서의 해석을 거쳐서 받아들인...색수상행식) 이 빚어내는 것인데, 이는 '실체(존재 자체)'
가 아니다, 모두 인위적, 주관적인 것이다, 당신이 괴로워하는 그것은 꼭 그런 것만이 아니다, 얼마든지 돌려
생각할 여지와 가능성이 있는 것이니, 나의 고민/번민이 다 편견과 망상임을 깨달을지어다.
(※ 개,짐승들은 사물이나 대상을 대할 때 사람처럼 '생각'을 하지 않는다, 비교적 '있는 그대로' 를 본다.
그러므로, 짐승들은 사람이 겪는 것과 같은 번뇌,망상은 없다, '개나 짐승들이 하듯이 살라'고 말하면 듣기가 불편
하지만, 반야심경은 그런 얘기를 한 것이다, 게다가 '피안(彼岸)으로 넘어가라' 고 합니다. 이 세상 말고 저 세상으로
넘어가라, 그렇게 아주 넘어가 버리면 어떻게 된다? 차안(此岸,이승)과는 결별하는 것이니'죽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럴 순 없다, 그것은 필요에 의해 실행하더라도 잠깐동안 이어야 한다, '피안(彼岸)'으로 넘어가기만 할 순 없다,
우리는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도를 닦는 것이다, 도가 자칫 삶을 지배한다면 삶은 질식되어 버린다,
그런 사례가 중세 암흑기의 역사다. 그런건 안됩니다.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성(聖)이 속(俗)을 압도해서는
안되고, 속(俗)이 성(聖)을 무시해서도 안된다, 양자(聖,俗)는 상보적이니, 더불어 존재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잠재성을 억누르지 말라, 있는 것은 드러내라, 그렇게 즐겁게 살면서, 도(道,聖)의 힘을 빌리는
것입니다. 잘 이용하자... (단, 道를 팔아 먹는 일은 큰 죄다!) 이것은 과연 '기쁜 소식' 이다, 현실의 삶에서
벗어나지 않는, 지속 가능한 '생활 속의 道'...를 말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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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반야심경의 '공(空)'에 대한 설명은 그리 되었습니다만, 세상을 '관조(觀照)'하려면 수련을 해야만 합니다.
마누라가 대문 여는 소리에 조차 흔들리는 내 마음을 굳건히 하려면, 수련, 내공이 반드시 필요하다,
한 시간 내리 쉬지않고 외는 주문수도, 석 달을 방에 앉아 오직 숨쉬기에 몰입하는 (安居)좌선, 자기가 갖고
있는 지식을 내려놓고, 재산을 투척하는 '물질공'(物質功)은 취미나 교양하고는 차원이 다른 얘기입니다,
깨달음은, 내 '자아(自我)'를 완전히 죽여 버리는 결단을 한 번은 내려야 합니다!
(성과 속, 차안과 피안을 가르는 '문지방'에 서서 잡아당기면, 사람들은 다 질색하며 도망가 버립니다)
연이나, 그 문지방을 넘고 난 연후에는 다시 이전처럼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도(道)를 위해서 인간의 잠재성,
삶의 즐거움, 기쁨과 쾌락을 희생한다는 것은 바보다, 즉, 어디까지나 즐겁게 잘 살기 위해서 도(道)를 닦는다,
다만, 모르고 갔던 길을 이제는 알고 간다, 그 차이입니다,
법륜, 선지식, 바티칸 교황, 예수, 공자, 노자 라 해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삶(생계)이 위협을 받지 않고 그냥저냥 살 만 하다면, 그 때 부터 자아는 편안함, 매너리즘에 빠집니다.
그렇다고 해서 일상을 강물에 나뭇잎 떠 내려가듯이 살 수는 없습니다. 계속 닦아야 하는 겁니다(증득增得)
고통과 시련, 힘든 시기(hard time)는 반갑지는 않더라도, '도 닦는 사람'에게는 필수(必須)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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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심경은 '공(空)사상'이 핵심이나, 그 밖의 문장들과의 맥락은 여전히 난문이고, 서로 모순된 부분도 있어
보이더라, 세상 모든 것에 부여된 인위적인 가치(=色)는 그 '실체가 없는 것' 이다, 또한 그것을 인식하는
내 생각, 감정, 오감도 주관적인 것이다, 도대체 무엇을 말하길래 이렇게 죄다 없다, 없다 라고 했더란 말인가?
그에 대한 대답은 단 하나 뿐입니다. 즉, '참 나' (True Self, God=하늘, 하나님, 主, 천지신명,도道,本主/天主,
根源, 海印, 大同, '이 뭣꼬')의 관점에서 말한 것이다,
'참 나'는 내 안, 즉 머릿 속에서 '세상만물을 비춰 보여주는 근원(根源)에서의 의식작용' 이고, 떠오르는 생각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의식을 비추이는 머리 속의 거울, 스크린이다, 오직 비춰 보여만 준다, 일체의 가치판단을
일으키지 않는다, 가치판단 작용, 즉 受 想 行 識은 '참 나'와 대비되는 '가짜 나' (=自我, 속세의 가치판단)의 역할이다,
참고: 비행기가 날아가다가 난기류를 만나면 땅으로 곤두박질 치듯 뚝 떨어지는 위급상황이 발생합니다, 승객들은
비명을 지르고 죽음의 공포에 휩싸입니다. 이 때, 지나온 날들이 영화의 스크린이나 주마등 처럼 머리 속에서
휙휙 지나갑니다. 이렇게 비춰 보여주는 현상이 '참 나'의 작용입니다.
.
삼라만상 일체(色)는 이처럼 내 안의 거울/스크린에 비추인 '상(像, Image)'인 것이며, 그에 대한 인식과 행동은
자아의 몫이다, '조견오온개공' (照見五蘊皆空, 비춰본 色.受.想.行.識 이 다 空하다)' 부분이 힌트(hint)였다,
영화(screen)를 보는 것 뿐이니, 박수는 치지 말라는 얘깁니다. 더 무슨 설명이 필요하리오?
격암유록등과 오쇼 라즈니쉬의 팬이라 그의 금강경해설책을 보다가 좀 의문이 들어서 검색하다
인연으로 들렷습니다만..
인터넷에서 법륜스님 유툽 을 보고 이건 아닌거 같은데..하고 다시 찾다가 님의 글을 보니 확 다가오네요.
감솨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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