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침용 땅굴

북괴의 대심도 땅굴- 서울은 지하로 포위...?

참 나 2010. 12. 4. 16:36

제1땅굴지역 예비역 하사관의 증언
 
 제1땅굴 바로 옆에서 소리
 
 1977년 제1땅굴이 발견된 고랑포 지역에서 동쪽으로 5백m 가량 떨어진 비무장지대 안에서 땅굴 굴착음 징후를 포착했었다는 예비역 하사관 ㅊ씨는 월간조선에 상세한 관련자료를 보내왔다. ㅊ씨의 제보자료에 따르면 그가 근무하던 모 사단 철책선 전방 비무장지대 안에 청음기를 설치했더니 땅굴 굴착음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이상한 소리들이 많이 들렸다고 ?다.
 
 「▲1977년 5월20일 미제 PK3 지오폰(청음기) 2개를 비무장지대 안에 매설. 다음날 국산 청음기 2대로 비무장지대 안에 매설.
 ▲6월7일 미제 청음기에서 폭음·해머·철판 소리가 처음으로 크게 들림. 녹음 후 내무반장에게 상황보고.
 ▲6월14∼15일 중대장 대대장에게 상황보고.
 ▲6월16일 오전에 미제 청음기에서 모터 소리, 파이프 치는 듯한 소리 들려 녹음. 6월19일까지 이런 소리가 계속 들렸음.
 ▲6월20일 청음기 추가 매설. 미제 청음기에서 모터·폭음·해머 소리 등이 아주 크게 나 긴급보고. 야간에 대대장·중대장·소대장이 급히 방문했으나 소리 나지 않음.
 ▲8월 1·4·8·12·16·19일 전과 유사한 음 청음. 미군과 비무장지대 안에 함께 들어가 청음기 교환.
 ▲9월8일 해머·모터 소리 녹음.
 ▲9월13일 지프차 3대로 미군5명, 연대 정보주임, 중대장, 대대장 등이 비무장지대 이상징후 지역 출입. 뒤에 1백6mm 무반동포 차량 3대 출동. 「유사시 명령이 떨어지면 발사하라」는 명령 내려옴.
 ▲9월15일 대대장, 화기소대장 착암기소리 직접 청음」
 
 ㅊ씨는 그후 근무교대로 이 지역에서 나왔기 때문에 상황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잘 모른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그때의 징후가 정지용(鄭址龍)씨가 이상징후를 포착한 구미리·아미리 지역과 연관이 있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당시 갱 차음이 들렸기 때문에 북한 땅굴은 비무장지대 남쪽으로 이미 굴설돼 있었다고 보여집니다. 그때의 소리가 땅굴과 관련된 것이라는 사실은 소리의 주기성에서 명백해집니다.
 
 그 지역은 북한 쪽 고지가 높아 한국군의 동태가 북한군에 의해 일일이 감시되고 있었는데 이상 음 발생으로 연대장·대대장이 현장에 출동해 법석을 떨면 소리가 그쳤지만 별 소란 없이 조용히 지휘관이 출동하면 소리가 계속되곤 했습니다. 뒤에 안 사실이지만 고랑포 인근 지역에서는 제가 들었던 소리와 비슷한 소리가 여러 곳에서 들렸었답니다.
 
 저는 鄭씨가 지적한 구미리·아미리 지역이 이 땅굴과 같은 축선에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미 발견된 제 1땅굴 바로 옆에서 소리가 났다는 증언과 安씨가 목격했다는 제1 땅굴의 옆 굴과는 어떤 연관성이 있을지도 모른다. 본 굴이 발견되자 이를 폐쇄하고 옆 굴을 이용해서 계속 뚫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예비역 ROTC의 증언
 
 전봇대 타고 온 착암기 소리
 
 1979년 모 대학에 입학한 뒤 ROTC에 지원해 ○○사단 ○○연대 4연대 쑥골중대에서 장교로 복무했었다는 ㄱ씨는 『근무기간 중 땅굴 굴착 음으로 확신했던 이상징후가 있었다』고 월간조선에 제보해왔다. ㄱ씨 부대는 정지용(鄭址龍)씨가 이상징후를 포착한 경기도 연천군 구미리에서 북동쪽으로 8·5km 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1984년 겨울 또는 1985년 초라고 기억이 됩니다. 중대본부 근처에 있는 도로변 전봇대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는 인사계의 얘기가 있었습니다. 처음엔 전선에서 나는 전기 유도 음인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는 것이었습니다. 현장에 가보니 문제의 콘크리트 전봇대가 우는 듯한 소리를 내고 있었습니다. 전봇대에 귀를 대고 들어봤더니 「드르륵 드르륵」하는 착암기 유사 음이 들렸습니다.
 
 더구나 간간이 「따가닥 따가닥」하는 철도 레일이 울리는 듯한 소리(갱차 음 추정)가 가까워졌다가 멀어지곤 했습니다. 더욱 이상한 것은 이런 소리가 밤중에만 계속되었다가 아침 6시면 뚝 그치곤 했다는 점입니다. 이 소리를 들어본 중대장 등 여러 사람들이 모두 의아해하게 여기며 「땅굴 굴착 음이 틀림없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저희 부대는 비무장지대 남방한계선에서 2 km쯤 떨어져 있었는데 1981∼82년경 우리 부대와 대치중인 북한부대 쪽에서 측량작업을 활발히 했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또 1984년 여름에는 부대 뒷산에서 야간 경계근무를 서던 초병이 「쿵」하는 폭발음에 놀라 뛰어내려온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2, 3일 동안 이런 이상 음이 주기적으로 계속돼 지휘계통에 다라 상급부대에 보고했고 청음 팀이 바로 출동했습니다.
 
 청음 팀은 시추기로 시추공을 뚫은 뒤 청음 하는 방법을 쓰지 않고 지표면에 청음기를 설치(지오하이드로폰을로 추정)하고 청음활동을 했습니다. 그 결과에 대해선 제 일이 바빠서 신경을 안 썼기 때문에 자세히 모르지만 청음 팀은 보름쯤 활동을 하다가 「별 이상 없다」고 결론을 내리고 철수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근무했던 곳은 월간조선 5월호에 보도됐던 구미리·아미리 일대와 같은 연천군 지역으로 동일 땅굴 축선에 해당되지 않나 생각됩니다. 구미리·아미리 지역은 제 근무지보다 훨씬 후방이므로 이상징후가 나타난 시간의 선후관계(구미리·아미리 지역은 쑥골중대보다 4년쯤 뒤인 89년경 이상징후 나타남)도 들어맞습니다』
 
 땅굴 가능성을 최초로 제기, 제2땅굴을 발견했던 정명환(鄭名煥)장군 증언
 
 땅굴을 잡은 사람
 
 호랑이에 대해 제일 잘 아는 사람은 동물학자가 아니라 호랑이를 잡아 본 포수일 것이다. 땅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땅굴 문제를 부여안고 직책과 명예를 건 승부를 하여 이긴 사람, 즉 땅굴 문제를 최초로 제기하여 전군(全軍)에 땅굴 경계 태세를 갖추게 한 뒤 스스로 제2땅굴을 발견했던 정명환(鄭名煥)씨(69·육사 8기 특별 3반 출신·소장 예편·경기도 과천시 거주)를 만났다.
 
 鄭名煥 준장이 제6사단장으로 부임한 것은 1973년 8월18일이었다. 그는 비무장지대를 시찰했다. 과거의 목책이 철책으로 바꿔진 것을 보고는 우리 쪽의 방어태세가 발전한 것이 대견스러웠지만 「내가 김일성이라면 철책선을 뚫기 위해서 다른 방법을 강구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여기서 땅굴을 떠올린 것이다. 철책선을 통과하기 위한 방법으로서의 땅굴! 그래서 鄭사단장은 연대장을 불러 『적이 땅굴을 파내려 올 가능성에 대해서도 대비하라. 초병들에게 이상징후에 대해서 관심을 갖도록 주지시켜라』고 지시했다.
 
 땅굴 발견은 정(鄭)장군의 순간적인 영감에서 시작된 것이다. 鄭씨는 『개인적으로도 운이 좋았지만 국운이 있었다는 얘기다』라고 회고했다. 일단 땅굴을 가상하니 이상한 현상들이 눈에 뜨이기 시작했다.
 
 북한 인민군지역에서 폭파 음이 자주 들려 미 8군에 항공촬영을 요청했다. 공사현장이 보이지 않는다는 답이었다. 폭파 음은 매일 북으로부터 들리고 있는데도…. 뒤에 안 일이지만 이 폭파 음은 땅굴 굴진 작업시의 지하 폭파음이 우리 군에 들키지 않도록 위장하기 위하여 일부러 타이밍을 맞추어 지상에서 터뜨린 것이었다. 73년 11월20일 새벽 4시 전방 대대장으로부터 사단장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평소 사단장께서 강조하시던 이상 징후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지금 올라오십시오』 鄭장군이 달려가 바위 층에 귀를 대고 들은 지하 폭파 음은 17발이었다. 손가락으로 탁자를 가볍게 치는 정도의 희미한 소리였다. 유병현(柳炳賢) 5군단장에게 보고했더니 『좀더 확인해 보세요』라는 신중한 반응이었다. 정(鄭)사단장은 「밤낚시」라는 작전 명을 붙이고 체계적인 지하 폭파음 청취에 들어갔다. 鄭사단장은 병원에서 청진기 스무 개를 거두어와 1백5mm 포탄 탄피를 연결한 탄통을 지하 2∼3m에 파묻고 여기에 청진기 앞 주둥이를 대고 듣기도 하였다.
 
 탄피를 연결하여 긴 대롱을 만들고 이것을 땅속에 파묻어 청진기처럼 이용하였던 것이다. 지하 폭파음을 듣는 장치가 그때 한국군에 없었는데 이때 鄭사단장이 고안한 청음방법은 최근에 정지용(鄭址龍)씨 등 민간인들이 쓰고 있는 방법과 흡사하다
 
 뚝 그친 지하 폭파음
 
 6사단에서는 1973년 12월3일까지 43회에 걸쳐 5백71발의 폭파음을 청취하였다. 12월4일부터 지하 음이 뚝 그쳐버렸다. 사단장은 12월2일에 땅굴 탐지를 쉽게 하려는 목적으로 야산에 불을 질렀는데 북한측이 이틀 뒤 작업을 중단한 것이었다. 곤란해진 것은 정(鄭)사단장이었다. 상부에선「지하 음은 없었던 걸로 하고 탐지 작업에 동원된 병력을 철수시켜라』고 지시했다.
 
 鄭사단장은 『내 목을 친 다음 그렇게 하라』고 버티었다. 공명심에 눈이 멀어 아무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그런 다느니 돌았다느니 하는 험담이 들려 왔다. 부하들도 불평을 하기 시작했다. 그때마다 사단장은 『김일성이는 폭파를 못하면 끌을 가지고 땅굴을 파고 올 인물이다』고 강조하였다. 정신적으로 시달린 사단장 부부는 도피안사(到彼岸寺)라는 절을 찾아 백일기도를 드리기도 했다.
 
 우리 쪽에서 실시한 항공촬영에서는 땅굴의 입구로 추정되는 북한측 지역에서 버럭(땅굴 굴진 작업으로 생기는 암석 부스러기)이 처리되는 것이 잡히지 않았다. 땅굴의 존재에 대해서 회의적인 지휘관들은 이 사실을 들어 鄭사단장을 곤경에 빠뜨렸다. 정명환(鄭名煥)씨는 요사이 군에서 주장하는, 「항공정찰에서 버럭 처리가 확인되지 않았으므로 땅굴은 없다」는 식의 논리를 「아주 안이하고 위험한 생각」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鄭名煥씨는 『요사이 민간 탐사자들이 받고 있는 오해와 모함을 미리 겪어 본 사람으로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고 하였다. 외부의 적을 이기기 위해선 내부의 벽을 먼저 넘어야 한다. 대부분의 경우, 이 내부의 벽 앞에서 개혁과 창조, 도전의 정신이 허물어지는 법인데 鄭사단장은 자기 확신으로써 견디어 나갔다.
 
 1974년 7월25일 새벽 지하 폭파음이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8월엔 1천3백83발, 탐사 시추가 시작된 12월엔 21발의 폭파 음을 청취했다. 폭파 음은 서서히 남쪽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사단에선 예상진로를 ㉮, ㉯, ㉰, ㉱ 4개로 잡고 있었다. 땅굴의 크기는 3각 측정법으로 2×2×2m 정도라고 추정하였는데 거의 정확하게 맞춘 것이었다. 군 안에선 땅굴의 출구가 형성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시추를 하자고 했고 鄭사단장은 『그렇게 해서 발견하면 북한은 우리가 북쪽으로 땅굴을 뚫은 것이었다고 뒤집어씌울 위험이 있다』면서 허리를 관통하자고 주장했다.
 
 시추는 5군단 공병 부여단장 장희성(張喜星)대령이 지휘하였고 학자들이 자문위원회를 구성하여 조언을 했으며 6사단은 지하 폭음청취의 경계임무를 전담했다. 농업진흥공사로부터 지하수 파는 시추기를 빌어와 영하 20∼27도의 혹한 속에서 시추를 개시한 것은 1974년 12월20일이었다.
 
 45개공 시추 끝에 발견
 
 ㉮ 지역에서 15개 공 시추, 실패. ㉯ 지역에서 12개 공 시추, 실패. ㉰ 지역에서 4개 공 시추, 실패. 마지막인 ㉱ 지역의 열세 번째 구멍에서 시추봉이 툭 떨어지고 시추공 내의 지하수가 빠지는 이상현상이 나타났다. 이곳을 집중적으로 뚫었다. 드디어 땅굴의 존재를 확인한 것은 1975년2월25일이었다. 석달 간 45개 공을 뚫어 땅굴을 확인한 것은, 지금 돌이켜보면 기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 90년 3월에 확인된 제 4땅굴의 경우, 특수 정보를 얻고도 시추에 7년이 걸려 발견되었다. 1978년 10월에 찾은 제3땅굴은 바로 이 땅굴의 측량기사로 일했던 김부성(金富成)씨가 월남하여 정보를 제공한 뒤에도 발견까지는 4년간의 탐사작업이 필요했다.
 
 그런 특수정보 없이 막연한 가상과 희미한 지하 폭파 음에서 출발한 鄭사단장의 집념이 단기간에 땅굴확인으로 결실될 수 있었던 것은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을 연상시킨다. 제3땅굴을 발견할 당시 1사단장 전두환(全斗煥) 소장, 제4땅굴의 발견에 결정적 기여를 한 당시 군사령관 이진삼(李鎭三) 대장(현 체육청소년부장관)도 무사 안일한 탐사 방식을 혁파하고 집념과 확신으로써 승부를 걸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무사안일을 추구하는 지휘관이나 관료주의적인 타성과 책임회피의 풍토에 젖은 사람의 손에 의해 땅굴이 발견되는 우연이나 행운은 절대로 없을 것이라는 확신을 鄭사단장의 예에서 재확인할 수가 있었다.
 
 가스, 지뢰로 8명 전사
 
 시추로써 땅굴의 존재를 확인한 다음 우리 군은 24일간의 작업으로 1백10m 길이의 옆 굴을 뚫어 북한 땅굴과 연결시킨 다음 전투태세를 갖춘 병력을 들여보냈다. 6m 앞에 북한 쪽으로 두께 88m의 버럭이 채워져 있었다. 수백 대 분의 암석이었다. 이 암석에는 이끼가 끼여 있었다. 먼 곳에서 옮겨 온 암석부스러기란 뜻이다. 鄭씨는 지금도 북한의 땅굴굴진 작업에서 나온 버럭을 트럭으로 먼 곳에 갖다 버리고 그곳의 암석을 갖고 와서 채우고 달아난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즉, 버럭을 땅굴 입구에서 처리하지 않고 야간에 트럭으로 날라다 버렸기 때문에 항공 정찰에 잡히지 않았다는 얘기로서 인공위성이나 항공기 정찰의 능력을 너무 믿는 군 탐지 부서 관계자들에게는 경종이 될 만한 견해다. 채운 버럭을 치웠을 때 1m 두께의 차단벽이 나타나 이를 폭파시켰다. 폭파 4시간 뒤 수색대를 투입시켰다. 장교 한 명과 사병 2명이 무전기로 『이상 무!』라고 보고하면서 땅굴 속으로 내려가더니 폭파현장에 이르러 갑자기 소식이 끊겨버렸다.
 
 또 3명을 내려보냈더니 똑 같은 장소에서 「무소식」이 돼버렸다. 구조대를 급히 보내 질식한 여섯 명을 끌어내다가 또 한 명이 질식, 모두 7명이 죽었다. 부검을 실시, 내장의 내용물을 일본에까지 보냈는데 정확한 사인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고 정(鄭)씨는 말했다. 다만, 굉장한 유독가스에 순간적으로 질식사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가스가 자연적으로 생긴 것인지 북한측이 깔아두고 간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고 한다. 6사단 병력은 제1의 차단벽 뒤에 제2의 차단벽을 발견하여 이를 폭파시켰다.
 
 그 뒤로는 5백10m에 걸친 지뢰지대가 깔려 있었다. 고고학 발굴하듯 대나무 꼬챙이로 살금살금 지뢰와 부비트랩을 제거해 가다가 한 사병이 지뢰를 발견했다. 앉은 자세 그대로 뒤로 조용히 물러나야 하는데 몸을 급히 돌리다가 대검이 지뢰를 건드려 폭발, 또 1명이 전사함으로써 희생자는 8명으로 늘어났다.
 
 지뢰지대가 끝나니 두께 7m의 제3의 벽. 이것도 폭파시키고 북진하니 5×10m와 6×18m 규모의 지하광장 두 개가 나타났다. 작은 것은 병력 집결장소, 큰 것은 1개 중대 병력의 집결지와 기계 설치대, 집수정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전진 작업기지로 추정되었다. 鄭사단장은 이 땅굴의 병력통과 능력을 시험하기 위해 3렬 종대로 통과실험을 해보았다. 구보하면 시간당 2만4천명, 속보로는 1만8천명이 통과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왔다.
 
 실제로는 산소 공급문제로 이 정도의 통과는 어려울 것이라는 견해도 있으나 鄭장군은 특수부대원 10만 명이 하룻밤 사이에 충분히 통과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땅굴 출구가 지표면에 개설되면 양쪽으로 지상과 연결돼 환기에 큰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는 게 그의 견해이다.
 
 11년 전에 장거리 땅굴 예언
 
 정(鄭)준장은 제2땅굴을 발견한 이후 소장으로 진급한 뒤 육군본부 민사군정감, 국방대학원 입교, 육본 인사운영감, 제2군수지원사령관을 거쳐 1980년 8월31일에 전역했다. 한국전력 감사와 재향군인회 사무총장을 지낸 뒤 경기도 과천에서 은퇴생활을 보내고 있다. 鄭씨는 한전 감사로 근무하던 1981년 8월5일자 일본산케이 신문 시바다(柴田穗) 논설위원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북은 지금도 땅굴을 파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음의 땅굴은 판문점과 서울 사이의 한 복판을 출구로 삼고 있지 않을까. 북은 지난 74년에 스웨덴에서 하루에 30∼50m를 팔 수 있는 기계를 5∼6기 도입했다. 이 기계는 지금 어디에 배치돼 있을까. 아마도 전선일 것이다. 내 생각으로는 그들이 이 기계로써 지하 2백∼4백m까지 깊게 파내려 간 다음 남쪽으로 굴진하고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땅굴 발견의 제1 공로자가 장거리 땅굴의 가능성을 11년 전에 이미 예언하였다는 것은 상당한 무게를 지닌 견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래서 기자가『무슨 정보를 가지고 그런 판단을 했느냐』고 물었더니 이런 비화를 털어놓았다.
 
 『1977년 국방대학원에서 공부할 때 하와이에 있는 미 태평양 사령부(주한 미군의 상급 부서)를 방문, 정보참모와 땅굴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 장교는 북한이 지하 약 4백m의 깊이로 땅굴을 뚫어 휴전선을 넘고 있다고 본다는 것이었다. 그때 우리의 상식으로는 지하 1백∼1백50m의 심도라고 판단, 탐사시추를 하고 있었다. 북한이 지하 4백m까지 깊게 급경사로 뚫었다가 완만하게 상승하면서 남한지역으로 파고들면 후방 깊숙이 침투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귀국한 뒤 한·미 야전사령관 홀링스워즈 중장을 만났더니 그 또한 같은 견해를 피력하는 것이었다. 1979년에 9사단 지역인 한강변에서 지하 작업음이 들려 북한이 한강을 건너 땅굴을 파고 있다는 의구심을 갖고 시추를 한 적이 있었다. 제2군수지원사령관 재직 시절 홀링스워즈 장군의 권유로 현장에 가보았는데 심도 1백50m 이내의 얕은 시추를 하고 있어 나무란 적이 있다. 여기서는 땅굴발견에 실패했다. 지하 소리를 놓친 것인데 이는 땅굴이 일선을 통과, 후방으로 빠졌다는 뜻이다』
 
 -정일용(鄭址龍)씨 등 민간인들이 벌이고 있는 땅굴 탐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일부 신문에선 소동이라는 식으로 보도했던데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그 지하 기계 음들이 북학의 땅굴 굴착 음이라는 믿음이 간다. 그들이 땅굴 발견 보상금을 타먹기 위해 사기를 친다는 오해를 받는 모양인데 나는 진급을 하기 위해 일을 꾸며대고 있다는 오해를 받았었다. 좋은 일은 어렵게 이루어지게 마련이다』
 
 -군 일부에선 장거리 굴착이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주장을 하고 있었데…
 
 『어렵지만 불가능하지는 않다. 문제는 김일성의 의지이다. 김일성은 대남 적화 야욕을 버렸을 때만 땅굴 굴착을 중단할 것이다. 내가 김일성이라면 어떻게 하겠느냐 라는 생각으로 땅굴 문제를 봐야지 우리 식으로 안일하게 생각하면 안 된다. 북한이 뚫은 땅굴은 최후의 하나만 발견되지 않아도 대단한 전략적 성공이 된다. 우리도 대를 이어 꾸준히 찾아야 한다』
 
 -군 담당 부서에선 휴전선 일대에서 네 개의 땅굴이 발견되었으므로 북한이 굴착을 중단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철원에서 제2땅굴 탐사를 한창 하고 있을 때인 74년 11월15일에 제1땅굴이 발견되었는데도 북한은 제2땅굴을 계속 뚫었다. 제2땅굴이 발견되었는데 그들은 제3땅굴 작업을 계속하다가 78년에 발각되었다. 그 뒤에도 제4땅굴을 계속 뚫었다는 것이 2년 전에 이 땅굴의 확인 과정에서 밝혀지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김일성이 제4땅굴만 뚫고 갑자기 심경 변화를 일으켜 작업을 포기했다는 말인가. 우리 군은 지금 그릇된 고정 관념에 기초한 그릇된 방법으로 땅굴 탐사를 하고 있다』
 
 전략적 땅굴의 가공할 위력
 
 -鄭장군은 11년 전 산케이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땅굴을 최후의 하나까지 찾아내지 못하면 실패한다』고 주장하면서 『군인은 물론 농민, 등산가 등 모두가 땅굴 찾기 운동에 참여해야 한다』는 제언을 했다. 이것은 민간부문도 땅굴 찾기에 동참해야 한다는 뜻인데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가.
 
 『땅굴이 전방을 돌파했다면 후방으로 진출, 굴진 작업은 민간인 지역의 땅 밑에서 이루어지고 이상 징후도 이 지역에서 나타난다. 예컨대 논에서 갑자기 물이 빠진다든지 하는 현상인데 이것을 국민들이 간첩 신고하듯 적극적으로 신고해 주어야 한다. 더구나 후방지역에서는 땅굴이 출구를 찾아 올라올 것이므로 탐사가 더 쉽다』
 
 -군에서는 전방지역이 좁으니까 여기를 집중적으로 시추해야 한다는 입장인데….
 
 『지하작업 음이 잡히는 데를 뚫어야 하는데 전방지역을 땅굴이 통과했다면 그런 소리가 안 들릴 것 아닌가』
 
 -최근 몇 년 사이에 후방지역에서 땅굴 이상징후에 관한 이야기들이 많이 나오고 있는 것은 땅굴이 80년대 초반에 전방지역을 통과 , 후방으로 진출한 시기와 거의 일치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지?
 
 『동감이다』
 
 -장거리 땅굴의 전략적 가치에 대해서….
 
 『서울 근교에 진출한 땅굴을 통해서 하룻밤 사이에 북한 특수부대 10만, 그중 8만이 경 보병여단인데, 이 정예부대가 서울에 나타나면 전쟁에서 진다고 보아야 한다. 북한의 정규 군대병력이 어떤 폭격으로부터도 안전한 파이프라인을 통해서 한국의 심장부를 강타하는 것과 동시에 전면 남침이 시작되면 우리 전방병력은 서울과 차단돼 협공을 당한 채 순식간에 궤멸될 수도 있다.
 
 적이 땅굴 출구 부근의 교두보를 하루만 확보해도 게임은 끝나는 것이다. 유일한 대책은 평양에 원폭을 투하하는 것인데 한국 안에서 핵무기를 철수했다는 지금, 미국이 그런 결정을 단시간에 내릴 수 없을 것이다. 배후에 적이 나타난다는 것은 등과 뒷 통수가 노출되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런 전쟁을 수행하기란 불가능하다. 수많은 전사(戰史)가 배후에 나타난 소규모 기습 병력에 의해 대규모 부대가 붕괴된 교훈을 가르쳐 주고 있지 않은가』
 
 -경 보병여단이 땅굴을 통해 나오더라도 차량이 없어 기동하기가 어려울 텐데….
 
 『흔한 것이 차량인데 현지 조달하면 될 것 아닌가. 더구나 그들은 틀림없이 국군복장을 하고 나와 처음에는 쿠데타군으로 위장할 것이다. 내가 민사군정감을 할 때 곰곰 검토해보니 전쟁이 나면 서울의 인파와 차량홍수 때문에 우리가 도저히 작전을 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났다. 전쟁이 나면 서울시민들은 집안에 있어야 하는데 과연 그런 질서가 유지될 것인지…. 도로가 피난차량으로 뒤덮이면 우리 군은 탱크로 그냥 깔아뭉개면서 작전을 하는 수밖에 없는데 과연 그럴 수가 있을지 모르겠다.
 
 어쨌든 6·25 때는 서울을 잃고도 버틸 수 있었지만 오늘의 한국은 그렇게 할 수 없으며, 그런 의미에서 북한의 장거리 굴착은 결정적인 위협요인이다. 내가 김일성이라면 자신만만할 것이다. 김일성이 1995년에 꼭 통일하겠다는 말을 땅굴과 연결시켜 생각해보면 전율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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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이 이미 땅 속으로 포위된 상태라면 그 대책이 뭘까요?

 

'開戰' 을 하더라도 세종시로 (청와대를 비롯하여) 서울을 옮기는 작업을 먼저 마쳐야 합니다. 

저들이 연평도 포격에 이은 무력도발을 또 한다면, 그 이유는 '남침용 땅굴' 을 써 먹어야 하기 때문이요,

만약 서울을 세종시로 옮기게 되면 저들의 목표는 '상황 끝~' 허무하게 되고 맙니다. 

따라서, 올해 ~ 내년 안에 어떻게든 전면전 비슷한 상황이 벌어질 겁니다. 

 

미사일, 군 부대, 비행장...주요시설물 위치를 옮기지 않으면 적들에게 헌납하는 꼴이 될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