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도인(道人)은 외로울 수 밖에 없다

참 나 2025. 8. 3. 10:08

*  *  *

도(賢)를 닦으면 왜 세상과 멀어지게 되는가?

1. '도(道)/진리(眞理)'란 연기법인데, 일상 삶의 (양극단적) 가치판단 중 어느 한 쪽에만 편승하지 않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세상살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음(陰)과 양(陽)의 현묘한 조화'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도인이라면 그것을 깨달았다는 뜻입니다. 속세의 삶이란 것은 뭣이 드냐? '좋은 것은 (절대적으로)좋은 것' vs. '나쁜 것은 (절대적으로)나쁜 것이다. 그와 대비되는 '현묘한 진리'는 무엇을 말하는가?  아니다,  '좋음'과 '나쁨'이란 것은 서로 비교되어서 드러나는 '상대적 가치'인 것이다. 

사람들이 '좋다'라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의식) 밑바탕에 깔려있는 '나쁘다'란 것과 비교했을 때 그 좋음을 평가받는 것 뿐이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인즉, 사람들의 '나쁘다'란 가치판단은, '좋은 것'을 기본 바탕(=default value)으로 깔아놓은 상태에서 그 비교선상에서 '나쁘다'는 가치평가를 내린 것이다;  이처럼, 좋음과 나쁨은, 그 어느 쪽도 자신만의 '절대가치'를 지니는 것이 아니다(=절대가치는 '공空' = 나쁨이 없다면 좋음도 없다 = 불구부정), 그것이 반야심경-연기법의 깨달음 입니다. 세 살 이후부터 우리들의 심층의식은 자고 일어나면 언제나 (제법/제행) 그 양가(兩價)적 가치를 무의식 속에서 가려내면서 살아왔던 것입니다. 

2. 도(道)를 닦고, 진리를 깨닫게 되면 이러한 편협한 가치판단(=고정관념)을 '내다버리는 일'이 벌어집니다. (도문에 들어서면 이런 일로 해서 악몽을 꾸게 됩니다) 남들이 좋아한다고 해서 나도 덩달아 좋아하지 않는다, 그 '좋음'이 생겨난 바탕이 뭣인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남들과는 다르고, 또 다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3. 이것이 예수님이 도마복음에서 '나를 따르는 자는 반드시 죽음을 맛봐야 한다'라고 한 말씀의 배경입니다.  세상살이에서 남들과 다르다면(似人非人) '죽음'과는 가까운 셈입니다.  이는, '요단강'을 건넌다든지, 또는 '가세 가세 저 (강 언덕) 너머로 건너가세'라고 하는 '반야심경 呪文'의 낙처(落處)입니다. 이걸 모르면, 도(道)를 닦았다, 진리를 깨달았다 라는 말을 할 수 없습니다. 

4.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인(道人)이라도 남들과 더불어 어울리며 살아야 합니다. 속세의 삶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러나, '희로애락'을 같이 하더라도, 거기에 빠져들지는 않는다는 것이 다릅니다. 유교 경전인 중용(中庸)은, 나의 감정이 드러나기 이전 상태를 '중(中)'이라 하고, 드러난 이후의 마춤한 상태를 '화(和)'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앞서, '중용 또한 연기법과 같다'라고 한 말은 바로 이 지점을 가리킨 것입니다.

5. 대저, 밑에서 위를 쳐다본다면 어디가 끝인지 안보이지만, 그 반대로,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터럭 하나까지 다 보입니다(=天網恢恢疎而不失, 道德經73章).  道를 깨달아 정각을 한 사람은, 어설픈 말을 하는 이들의 일거수일투족, 말 한마디 삐끗한 것, 심지어 하지 않은 말이라도 환하게 짚어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 ---------------------

p/s

우리가 엄마 뱃속에서 태어난 것 까지는 그렇다치고, 젖을 먹고 자라나서 이윽고 세상과 부딪칩니다.  엄마에 이어서, 아버지가 눈에 보이고, 주변 사람들이 나타납니다. 이후, 세상사람들이 내 앞에 나타납니다. 태어나서, 세상살이를 한다는 것은, (대책없이) 현실에 내동댕이 쳐진 것입니다. 도(道)에서는, 그처럼 내동댕이 쳐졌던 삶(=생존의식)을 돌이켜보고, '바른 의식'을 잡아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