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는 복음(福音, Evangel, Gospel, 복된 소식)을 전달하고 전파해야 하는 것이 본래의 임무입니다.
'복음'을 가르치고, 수련도 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이게 정말로 '복음' 이로구나 하고 사람들이 느낄 수 있도록 전달해야
합니다. 지금 사람들은 복음을 대하면서도 '복된 소식'이라는 느낌을 갖지 못한다, 빈껍데기 복음이 되어버렸다, 왜 그런가?
동서고금의 성인, 성현, 철인 들이 허튼소리를 했을리가 없습니다.
단지, 벌써 오래 전 부터 종교계가 복음을 제대로 수용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전임자나 후임자나 목회자들이 제대로 (복음을)아는 사람이 없다, 하여, 자신들의 본업을 외면하고, 현실과 영합(매너리즘)
동서고금의 성인, 성현, 철인 들이 허튼소리를 했을리가 없습니다.
단지, 벌써 오래 전 부터 종교계가 복음을 제대로 수용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전임자나 후임자나 목회자들이 제대로 (복음을)아는 사람이 없다, 하여, 자신들의 본업을 외면하고, 현실과 영합(매너리즘)
하는데 머물고 있습니다. 목회자나 승려들의 죄가 큽니다, 기독교,천주교를 비롯, 언필칭 고등종교라고 하는 불교,힌두교,
이슬람교 등이 무늬만 종교(福音)일 뿐, 제 할일을 못하고 있다, 밥 값을 못하고 있습니다,
도마복음서의 다음구절을 살펴보면 그것이 진짜로 '福된 消息'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설명을 해 드립니다.
"If you bring forth what is within you, what you bring forth will save you.
네 안의 것을 낳으면 네가 낳은 그것이 너를 살릴 것이요,
If you do not bring forth what is within you, what you do not bring forth will destroy you"
도마복음서의 다음구절을 살펴보면 그것이 진짜로 '福된 消息'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설명을 해 드립니다.
"If you bring forth what is within you, what you bring forth will save you.
네 안의 것을 낳으면 네가 낳은 그것이 너를 살릴 것이요,
If you do not bring forth what is within you, what you do not bring forth will destroy you"
네 안의 것을 낳지 못하면 네가 낳지 못한 그것이 너를 파멸케 하리라.
'가짜 나'는 나의 본질이 아니다 라는 생각으로 분리해 내라, 털어내라! 그게 되느냐 안되느냐는 것이 네가 죽고 사는
'가짜 나'는 나의 본질이 아니다 라는 생각으로 분리해 내라, 털어내라! 그게 되느냐 안되느냐는 것이 네가 죽고 사는
갈림길이다, 현실세계에서 겪는 온갖 정신질환, 불안,고통,괴로움은 모두 다, 가짜 나(自我)가 겪는 것입니다.
그것을 진짜 나, 마치 본질로 착각하기 때문이니, 이를 분리해 내기만 하면 문제가 해결되는 겁니다. 간단합니다.
현실의 삶은 자아 (自我 ='가짜 나', 육체, 마음, 생각, 감정, 오감)가 경영(담당)하는 영역입니다.
현실의 삶은 자아 (自我 ='가짜 나', 육체, 마음, 생각, 감정, 오감)가 경영(담당)하는 영역입니다.
그런데, 그 자아란 것은 삶의 수단,연장,객체일 뿐이다, 따라서, 내가 임의대로 조종하고 변화시키는 그 무엇일 뿐이다,
자아를 내 의지대로 부릴 수 있어야 한다, 자아는 본질이 아니다, 우리가 그것을 본질인 것으로 잘못 알고, 나의 본체인양
착각(同一視)하기 때문에, 자아에 생긴 일을 죽고 사는 심각한 문제로 여기게 됩니다. 여기까지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제 그것을 '가짜 나'에 생긴 일로 다시 정리합니다.
이제 그것을 '가짜 나'에 생긴 일로 다시 정리합니다.
인식을 달리하고, 내 본질에서 분리 (bring forth...) 해 냅니다. 자아가 현실에서 겪는 모든 문제는 마치 제3자가 겪은 것
처럼 말입니다. 자아는 객체(客體)일 뿐이다, 자아는 남이나 마찬가지다, 내가 지켜보며, 조절할 수 있는 그 무엇이다,
- 자아(自我)는 고치면 된다!
- 자아(自我)는 바꾸면 된다!
그래서 자아를 '가짜 나' (변화하고 연출하니까) 라고 한 것이요, '깨달음' 이란 것이 바로 이겁니다. 生死가 걸린 일이지요.
문제는 내 묵은 자아가, 고치고 바꾸는 일에 강렬하게 저항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완고한 복마(自我, 伏魔)의 저항을
극복해야 합니다. 수련이란게 뭐냐? 그걸 하자는 것이 바로 수련이다, (자아의 극복, 자아를 들어내는 것, 그러나 그것은
사실상 '죽음을 맛보는 일'이다, 내 삶의 기반인 1.돈(물질)과 2.자아를 포기한다...는 '깊고 무서운 진실'이 드리워져 있습
니다. 내 '생존무기'를 다 걷어내고(format, reset), 맨 발로 다시금 세상을 대한다는 각오는 가상합니다. 연이나 그걸 치뤄
내지 않은 깨달음은 기초가 없는 건물처럼 허술하다)
'네 안의 것을 낳으라'(자아를 떼어내라,들어내라,분리하라), 그러면 너는 살게 되리라, 이것이 복음이고 진짜 구원입니다.
'네 안의 것을 낳으라'(자아를 떼어내라,들어내라,분리하라), 그러면 너는 살게 되리라, 이것이 복음이고 진짜 구원입니다.
수도승, 선사들이 하듯이 수련(틀에 박힌 방식)을 통해서 이런 경지를 체득하려면 부지하세월(不知何歲月) 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세수하다가 코를 만지는 것 처럼 쉽다'...라고 표현했듯이, 다소 먹먹하더라도 그냥 '자아는 내 본질이
아니다' 라고 선언하고 들어가는 겁니다. 깊은 물을 퍼 올릴 때 쓰는 마중물의 역할처럼 하나의 방편이다,
제대로 된 깨달음은 나중에 얻더라도... 우선은 내가 고통과 번민에서 벗어나야 하므로 '자아는 나의 본질이 아니다',
'자아란 갈아 입는 의복과 같다' 고 외칩니다. 그렇게 자아인식을 새롭게 하고, 바꾸고, 털어내면(bring forth) 자아가
짊어진 짐은 가벼워진다. 그 궁극은 해탈입니다만,
'自我'를 내 근원(根源 ='참 나', 진짜 나 = 萬生命 共通意識 =하나님) 으로 부터 떼어(分離)내라!
'自我'를 내 근원(根源 ='참 나', 진짜 나 = 萬生命 共通意識 =하나님) 으로 부터 떼어(分離)내라!
그리하여 삶에서 겪는 무거운 짐(불안,공황장애,고통,번민)에서 벗어나라! 이것이 가능하다, 그러니 이걸 해서 이겨내라!
이것이 '복음(福音)'이다, 동서고금 모든 종교, 수도(修道), 명상(瞑想)의 공통바탕(플랫폼 platform)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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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이는 기독교, 성경이 말한 것과는 생소하다, 그러나 예수의 핵심 메시지 입니다. 이처럼 어려운 얘기를 했기 때문에
사도들이 '도무지 못알아 먹겠다'고 불평했던 것입니다.
,
자아를 분리해 낸다...? 말은 쉽지만 실제로 그리하기란 어렵지요. 세 살 이후 습득한 세상살이 지식을 리셋 해야 한다!
자기 자동차를 누가 건드리기만 해도, "왜 건드려?" 하고 신경을 곤두세우는 사람들이지요. 자신의 소유물인 자동차를
자기자신과 같다(同一視)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나와 관련되는 물건은 모두 다 나...라고 생각하도록끔 조건
지어져 있습니다. 사정이 그러하건데, 하물며 내 육체, 내 마음, 내 생각/감정/오감을 (마치 남인 것 처럼) 떼어 낸다는
것은 이 세상살이와는 다른 차원의 얘기다, 그러나 그걸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의자에 앉아서 컴퓨터 화면을 보고 있지요? 이 때, 누군가가 방문을 열고 의자에 앉아있는 귀하를 쳐다본다고
가정해 봅니다. 그 쳐다보는 사람이 바로 나...다, 내가 나를 쳐다보는 겁니다. 그냥 아무 생각없이 쳐다 보는 겁니다.
(눈을 감고) 내가 앉아 있는 모습을 머리 속으로 그려 봅니다. 가급적 또렷이 이미지(상상)합니다. 그 그림이 또렷할
수록 자아가 잘 분리됩니다. '유체이탈'이 연상되는 이런 테크닉이 바로 자아를 타자화(他者化)하는 테크닉입니다.
또 다른 방식은, 내가 자리에 누워 있다면 그 누워있는 형태를 천장에서 본 버젼(version)으로 머리 속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현대사회에 그토록 흔한, 불안장애, 공황장애로 부터 벗어나는 (客體化)테크닉이다,
약2,500년 전, (유체이탈 같은) 이러한 정신수행에 빠져서, 산송장이 되어버린 '소크라테스'에게 멋도 모르고 다가 온
나이어린 부인 '크산티페'가 얼마나 놀래고 당황했을지 상상이 갑니다. 엉겁결에 손에 든 뜨거운 찻물이라도 끼얹어서
늙은 남편의 정신이 돌아오게 하려고 했던 것이지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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