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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출생지는 서울특별시 중구 예장동 4번지인데, 인근에는 KBS 방송국이 있었습니다. 1953.11.13일 새벽 4시에 출생했으니 사주가 癸巳, 癸亥, 戊辰, 甲寅이 되는데 2010년 경에 명리학을 공부했다는 친구가 보더니, 이거 죽은사람 사주 같다고 해서 실소를 하고 말았지요. 사실, 이런저런 사고로 죽을 고비를 열 번 정도 넘겼습니다. a. 세 살 남짓, 남산 집 구름다리에서 추락했는데 한 3m 높이였다고 하는데, 당시 놀래서 뛰쳐나간 누나가 전하기를 반듯이 앉아있었다고 하는군요. 다친데도 하나 없이, 하여, 삼신할머니가 받들었다는 얘기를 전합니다. 이후 가세가 몰락하여 남산 적십자 사택을 내놓고 왕십리 집으로 이사를 한 것이 1958년이니 여섯 살 때입니다.
b. 중학교 2학년 개학하고 3월 경에 친구들과 자전거를 타고 마장동까지 갔는데, 길가에서 택시와 충돌하여 몇 m를 날아갔지요. 왼쪽 정갱이에 복합골절이었는데, 택시 기사가 나를 안아 들어 올리는데 부러진 다리가 덜그럭거렸던 기억이 남아있습니다. 죽을 고비를 넘겼지요. c. 1979년, 직장 대한석유공사에서 미국 Gulf사 OJT 연수를 가는 길인데, 경유지 LA 공항에서 피츠버그행 (예약) 비행기를 놓쳐서 허둥대다 횡단보도 빨강 신호를 못 보고 건넜고, 큰 차가 급브레이크를 밟는 일이 있었지요. 차 안에서 남자애가 고함치는 소리가 들렸고, 절체절명의 비명횡사 고비를 넘겼습니다. 이후로도 아찔했던 순간을 여러 차례 넘겼습니다. 무진 일주 사주에 있는 '백호대살'이란 게 오늘날 호랑이는 없으니 (교통)사고를 조심하란 말이렷다,
1992. 12월 유공 자회사(HIMONT 합작)의 관리부장을 지내던 중, 외국인 사장과의 불협화음으로 당치도 않은 해고를 당했는데 그 충격으로 한 달 만에 체중이 10Kg나 불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연말에 해고라니 엄청난 충격이었지요. 그러고 나서 두 달 후, 장인어른의 서초구 사업장에를 가서 도와드린다며 출퇴근을 하는데, 그때 강남역 지하에서 도(道)에 관심이 있느냐며 접근한 선각을 만나서 대순진리회 (성수동 상원 연락소)에 입문하였습니다.
주문 수도(기도 공부)를 했지요. 새벽 한 시에 연락소에서 열두 개의 주문과 함께 태을주(太乙呪: 훔치훔치, 태을천 상원군 훔리치야도래 훔리함리 사바아)를 집중적으로 기도 수련했습니다. 한 시간을 내리, 앉아서 태을주 암송을 하는데, 칠백여 차례 반복을 합니다. 엄청 힘듭니다. 그 와중에 별일들이 다 생기고... 당시 중곡동 본부도장에서의 일인데, 수 백 명의 남녀가 모여서 새벽 한 시에 집단으로 태을주 주문을 암송합니다. 일사불란. 정해진 음조대로 남녀 수백 명이 목청껏 암송하는 소리가 압권입니다. 힘든 것은 물론이고, 카타르시스랄까, 앉아서 눈물을 쏟는 사람이 제법 많이 나옵니다. 앉은 방석이 젖을 정도로 웁니다. 깨달음과는 거리가 멀지만, 내 안에 쌓이고 정체되었던 맺힌 기운들이 녹아내리는 것입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주문 수도를 그 때문에 시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효과가 확실해서, 힘든 한 시간을 지내고 나면, 수련자들의 얼굴이 다 들 달라져 있습니다. 끝냈다는 안도감, 순수하고 티없는 표정들....
然이나 道通, 깨달음은 기도수련 따위로는 어림도 없다; 도통하고 깨닫기는 커녕 매스컴에서 보듯이 종단에서의 내분 사태가 엄청 시끄럽습니다. 수도, 수련으로 도통을 하고 깨달음을 얻는 것이라면, 지금 수많은 도통군자와 각자(覺者)가 배출되었어야 할터이나, 그리해서 되는 일이 (전혀) 아니었다, E=MC2를 說한 (故)성철 스님을 위시하여 불교종단의 그 어떤 선지식도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그것은 위키피디아, 인공지능(AI) ChatGPT 검색을 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아직도 깨달음의 설명이나 반야심경의 해석조차도 제대로 되어있지 않다, 종단에서의 수행(하/동안거)은 틀에 박힌 반복동작일 뿐이다, 수행을 하면 할수록 부질없이 자아(自我)만 강화할 뿐이로다. 종단의 전례의식들은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지만 그것이 한계인 것이다.
1994년, 성수동 상원 연락소의 책임자 장(張)선감으로부터 '표성금'을 하라...는 선각의 전달이 있었고, 한 달 넘게 선각과 실랑이를 벌인 끝에, 지금으로 치면 현찰 1억 원을 007가방에 가득 채워서 헌납하였습니다. 당시, 몇 십만 원 정도의 성금은 잦은 편이었고, 연락소의 운영비로 씌였지요. 당시 유공에서 퇴직금 받은 것부터 현금은 꽤 있었습니다. 그러고 나니, 도심(道心)이 몰려들면서, 속세(俗世)의 생활은 이제 그만해도 좋다 라는 심정이 되어버렸습니다. 그게 바로 '표성금'의 효과였다; 물질(속세/현실)에의 집착과 인연을 끊어내려면, 목숨처럼 여기는 재물을 다 내던져야 한다, 죽음까지도 불사하련다 라는 처절함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 경험도 없이, 자기 재산은 뚱쳐놓고, 딴전 부리며, 도(道)를 닦았네, 도통했네...란 얘기는 어불성설이지요. 성경의 말씀처럼, 부자가 하늘나라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처럼 힘들다 라고 하였으니, 예수님도 "나를 따르려면 죽음을 맛봐야 한다" (=taste death)란 얘기를 성경은 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표성금/ 물질공의 낙처(落處)입니다. 그런 전후 맥락도 없이, 가진 재산을 다 털리게 되면 가정이 파탄나고 사회는 엉망진창이 될 겁니다. 하여, 표성금을 없앴으니 (94년 10만 원 이상, 지금 돈 3~40만 원) 받지 말라는 도전님 지시가 있다 하여, 그 해 4월 제주도 도장(노형동) 특수수련기도반(제139반)에 참여했던 저는, 선감(講師)으로부터 전해 들었습니다. 제 마흔 살 나이, 알토란 같은 현찰 1억 원을 투척하면서, 빈털터리 신세를 각오하고 속세를 떠나려 했던 일, 이것이 바로 "나는 죽음을 맛봤다"라고 하는 배경인 것입니다.
그 후, 2010년에 또 눈물이 터졌습니다. 13년 동안 같이 일하던 여직원을 (멀리 떨어진) 장안동 거래처로 (약속어음)수금을 보내는데 무릎이 좀 불편했지요. 괜찮다고 하며, 절룩거리며 떠나는 뒷모습을 보면서 눈물이 쏟아지는데, 그로부터 일주일을 내리 울었습니다. 화장실 벽을 짚고서도 울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통곡을 할 정도로 슬픔이 밀물처럼 몰려들었습니다. 글 쓰는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울렁울렁하네요. (나는 슬픔이나 울음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으니...)
이런 대강이 '업장소멸'이란 제목으로 쓴 글이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