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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은 산, 물은 물'...붙들면 괴롭고, 놔 버리면 편하다

참 나 2020. 2. 16.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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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움직임(諸行), 모든 대상(諸法)은, 마치 하늘에서 비치는 햇빛처럼

누구한테나 고루 다 보이고, 들리고, 느껴질 수 있는 '객관적인 것'들 입니다,   

즉, 내가 의식하건 말건, 나와 상관없이 스스로 존재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다가,

그것이 내 인식범위(두뇌활동)로 들어오는 순간 '맛'이 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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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내가 그 대상을 인식하는 '가치'가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다,

그런데, 그 '가치'란 것은 주관적이어서 사람마다 기준이 다르고, 또 변할 수 있다,  

'변할 수 있다', 이것이 '메시지'입니다. 

그 변화 가능한 속성, 주관적 가치...를 불가(佛家)에선 '실체가 없다' 라고 말합니다.   

¶ '아니다, 내 생각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사이보그 또는 벽창호쯤 될 터이다.

우리 모두는, 자신만의 그 '주관적 가치'에 목을 매고 살아가는 가련한 존재입니다.

 

태어남(生), 나이 듦(老), 병듦(病/苦), 죽음(死)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닥치는 일 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붙여진 가치{色: 편견/선입견/고정관념}는 문화/사람/상황에 따라 다 다르다,   

어떤 상황 내지 어떤 맥락이냐에 따라서, '같은 것'도 다르게 받아들여진다(=諸行無常, 諸法無我)  

a.'실체'로서의 모든 움직임/대상(行/法)과  b. 그에 대해서 내가 인식하는 가치(色)는 '별개의 것'이다, 

※ 그 가치(色)란 것 마저도, 반야심경에선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 하여 '연기법'에 따른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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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은 산, 물은 물, 그리고 사람은 사람, 음식은 음식...'

이는, 특정 대상의 '객관적 실체'와, '주관적 가치(=色)부분'을 서로 분리시켜서 보라 는 뜻이다,

¶ 이를 실천하는 일은, 지금까지 당연하기만 했던 세상을 대하는 나의 태도/사고방식을 바꾸는 일이므로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도(道)를 닦는다'라고 하였습니다.

 

친구가 전화를 걸어와서, '우리 산에 한 번 갈까?' 라는 말을 했다면, 내 머릿 속에선 '어떤 산(...?)'이

떠오릅니다. 온갖 산(山) 중에서, 전(前)에 같이 갔던 산, 가까운 산, 먼 산, 높은 산 낮은 산, 단풍 산 등 

여러 산이 떠오릅니다. 이 때, '산은 산, 물은 물'...하는 식으로 퉁쳐 버린다면, 혼란함과 번거로움이 

싹 날아가 버린다,  마치 음식점에 가서 '아무 거나 주세요'(=다 괜찮다)는 것과도 같다. 

 

'그냥 산'이다, 이리하여, 갈등/번뇌/망상을 다 사라져 버리게(=앎을 무효화) 만드는 것입니다. 

'산(山)/물/사람/음식' 등은 나와 상관없이 늘 있는 것, 객관적 실체다,  그렇지만,

거기에 따라붙은 가치{色, 내 선입견/편견/고정관념/집착}는 '바꿀 수 있다'라는 얘기입니다, 

'어떻게 돌려서 생각하고, 집착을 떼느냐'가 중요하다, 그리하여, 내 문제를 가볍게 하거나 털어낸다,   

화엄경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모든 것은 다 내 마음이 빚어내는 것)가 그 얘기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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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내가 왜 구차하게 생각을 돌려서 해야 하나? 그런 의심과 반발이 일어납니다.    

도(道)에서는 이제껏 살아 온 방식과는 반대되는 사고방식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피안{彼岸, '판 밖'의 공부/ 요단江을 건너 감/죽음을 맛 봄}으로 '건너간다'라고 하였다,  

 

  ¶ 붙들고 있으면 괴롭다, 다 놓고 건너가 버리면 편하다, 그래도...아니, 그래야 잘 살 수 있다, 그것이 '信仰'이다.

그 대답이 '반야심경'의 '연기법'(緣起法)이다, 그걸 모르고 떠들 때 '어리석다'라고 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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