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에게 진주를 던져주지 말라
(전략)
그래서 고타마 싯다르타(석가모니)께서도 깨달음 뒤 망설이셨던 게다.
"내가 법을 가르친다 해도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며, 나만 지치고 실망하게 될 것이다" 註 1
긴 고민 끝에 45년의 기나긴 가르침의 길에 나서셨건만 그 제자들은 끝없이 엉뚱한 소리를 해댔다" 註 2
그분은 세상 모든 존재와 사건이 고유의 독립된 실체가 없으며, 모든 게 원인과 조건에 따라 서로 註 3
기대어 일어났다 사라진다 하셨다.
그런데 그 제자들은 정반대로 실체로서의 극락이며 서방정토며 영원히 여기에 머무르는 '나'를 믿었다. 註 4
45년의 가르침은 다 어디로 간 건가. 그래도 그분들은 제자들에게 진주를 던져주었다.
그래서 세상이 이만큼이라도 나 아닌 타인과 다른 사물을 인정할 수 있게 되었으리. (후략) 註 5
<김형태 칼럼, 한겨레, 2010.2.15>
9년 전의 오래된 신문 스크랩인데 같이 음미해 보면 좋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글에는, 노무현의 민주당 지지발언으로 권한정지/탄핵심판에 오르고, 수도를 옮기는 것이 합헌인지를 묻고,
미네르바 경제평론과 쇠고기 수입정책 보도 등의 시대적 배경을 갖고 있는데, 모든 것을 대화와 타협 대신 법으로만
재단하려는 '법치주의'가 과연 바른 길인가를 비판적으로 묻습니다. 인용한 부분은 해당 칼럼의 서론(序論)입니다.
주 1.
본시 깨달음이란 것은 아무리 설명해 봤자 사람들은 뭔 소린지 이해하지를 못합니다,
부처님 시절이나 지금이나 똑같다, 오죽하니 '염화시중의 미소' 라고 하여, 영취산 설법 때 석가모니가
연꽃을 들어보이자 제자 가섭이 빙긋이 웃었다는 말로 그 어려운 경지를 전했으랴?
千, 萬에 하나가 알까 말까 하다는 것이 깨달음입니다. 그런데, 세수하다 코를 만지는 것 만큼이나 쉽다는 말도
합니다. 그처럼, 아는 사람은 별 것이 아니란 것을 압니다. 코끼리를 냉장고에 어떻게 넣는냐고?
냉장고 문을 연 다음, 코끼리를 집어 넣으면 된다, 이것도 말이 된다고 하는 이유는,
본인 자신이 도통(道通)을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게 어떤 경지를 말하는가...는 알기 때문이다,
도가(道家)에서는 '하빠리 도통'이란 말도 합니다. 물론 '窮極의 境地' 란 것은 무망(無望)할 터이다,
종교나 사상계 에서, 그나마 '깨달음'을 말하고, 게다가 일상의 삶에서 실천까지 하며 사는 이가 누가 있나요?
단 한 사람이라도 나왔나요? 제가 보건데 아직 나온 이가 없다. 왜 그러냐?
불교계 간판급 유명인사인 '법륜' 스님이 반야심경을 해설(열 몇 편짜리 동영상 시리즈) 하면서 헛소리 하는 것을
보았고 (¶ 반야심경의 부증불감이란 '비행기 안에서 사람들이 화장실을 갔다 왔다고 해서 비행기 무게가 변하는 것이 아니다'
라는 식의 어처구니 없는 설명을 한, 이 사람은 강사(講士)일 뿐, 자신의 깨달음을 전하는 覺者는 아니다)
청담, 성철, 법정을 비롯하여 큰 스님, 선지식 반열의 인사들이라 하더라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다,
다 들, 어렵다 어렵다 하면서 변죽만 울린다. 하여, 저는 반야심경을 혼자서 해득(解得)해야 했습니다.
'위키피디아'를 비롯한 인터넷 검색에서도 깨달음 분야는 별 도움이 안되었다,
동서고금의 모든 지식이 인터넷에 뜨는 지금도 사정이 그러하다.
정각(正覺)을 이룬 분은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단 말인가? 그 분의 삶은 어떤 모습인가? 그것이 궁금하다,
'도올', 이 양반이 헛소리하는 것은 차라리 애교라 치자. 그런 '도올'을 보고 '노자를 웃긴 사나이'라면서
비판을 한 구르미 이경숙 여사도 에러를 내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聽之不問 視之不見, 들려도 듣지 못하고 봤어도 보지 못한다...대목 관련)
주 2.
부처님 살아생전, 곁에서 모시던 제자들도 어리버리 했거늘, 2천5백년이 지난 지금의 사정이야 말해 무엇하리?
기독교, 가톨릭은 예수 사후에 만들어진 종파이거니와, 성경 곳곳에 나오는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하며,
예수 본인이 겪었던 그 답답함은 '석가모니(釋迦牟尼)'와 판박이였다,
주 3.
김변호사는 '연기(緣起)'를 얘기한 것인데, 이는 통속적인 사전(事典)의 단어풀이 수준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원인이 있으니 결과가 있다(원인-결과)'라는 것은 부처의 '연기'가 아니다, 그것은 맹탕이니 '메시지'가 없습니다,
연기(緣起)란, 세상만물을 대하는 사람들의 '가치관념(가치놀음)'이란게 어떻게 만들어지고 작동하는 것인지를
말한 것입니다. 상반된 모든 가치들은 상보적이다. 같이 태어나고 같이 소멸한다, 반대쪽을 드러나게 합니다.
¶ '반야심경'의 '色卽是空 空卽是色'은 연기를 말한 것입니다. '色卽空'이 아니라 '是'자가 들어 있는 차이를 알아야 합니다.
즉, '있다(色)'라 함은 '없다(空)'는 것이 바탕에 깔려있다(是)는 뜻이다, 그 반대로 '없다'라 함은 '있다'는 것이 바탕에
깔려있다(是)는 의미다, 이렇듯, 상반(相反)되는 것은 상보적(相補的)인 것이다,
.
'연기'를 이해하면 거기서 '자비, 사랑'이 도출되어 나옵니다.
'쓸모 없는 것'의 바탕이 있어야 비로소 '쓸모 있는 것'이 드러난다!
즉, 흙탕물의 더러움이 있기 때문에 비로소 연꽃의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것이다!
온갖 기화요초(琪花瑤草) 속에서 핀 연꽃이라면 아무도 쳐다보지 않았으리. 그런즉,
더러움과 깨끗함은 불가분의 '한 짝'이로다. 이것이 '염화시중의 미소', 정각(正覺)입니다.
주 4.
이제껏 인류는 석가모니 또는 예수님의 말씀(思想, 眞意)을 거의 못 알아들었습니다. 소위 '믿음'이란 것이
그토록 공허(空虛)하다, 말씀은 다 흘려버렸고, 핵심사상도 건지지 못했다. 무슨 논쟁이 필요하리오?
성경이나 경전들은 장식품이 되어 버린지 오래다, 이들에게 석가나 예수의 일은 허업(虛業) 이었도다.
신도들은, 말씀대로 실천하며 사는 것은 고사하고, 기껏 '좋은 말씀'을 이용해 먹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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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깨달음이 왜 이렇게 어려운가?
그것은 우리가 세 살 이후에 형성되고 굳어져 버린 의식(고정관념, 선입견 등)을 리셋(reset)하는 일이라서 그렇다,
(오리)알에서 깨어 난 새끼오리는 자신을 부화시켜 준 '어미 닭'을 자신의 어미인 줄 알고 따라 다닌다,
'그 어미는 네 진짜 어미가 아니다' 라고 알려줄 때 갖는 충격과 혼란스러움은 깨달음을 얻을 때와 마찬가지다,
태어나서 내 의식 속에 굳어진 온갖 가치관들, 즉 부모/주위/자신의 경험으로 부터 습득한 일견(一見)
당연한 것들을 '교육/학습'이라 하나, 사실은 세상에 대한 선입견,편견,고정관념 (희로애락의 바탕)인 즉,
자가세뇌(自家洗腦), '셀프세뇌'라 불러 봄 직 하다.
불가에서 '오염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예외일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으리오?)
내가 마음 먹기에 따라서, 또 다른 가치해석이 가능하다...그걸 아는 것이 '깨달음'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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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적이나 기적, 신통력의 발휘...이런 환상들은 혹세무민(惑世誣民)일 뿐 '깨달음(心法)'과는 상관이 없다.
콩을 심었으면 콩을 수확해야지, 얼토당토 않은 팥을 수확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외물(外物)에 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인과율(因果律)의 우주법칙을 어지럽히는 일이다, 이적과 기적,신통력,부활 등도 다 쓸데없고,
오직 내 의식(생각)을 여하히 바꾸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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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좀 아는 척을 하는데, 그 사람의 설명에서 벗어난 부분이 눈이 띄었습니다. 쉬운 말로 일러 주었는 데도
그 부분을 간과했노라 라는 진솔한 반응이 없더라, 그러고서는 뭔 소린지도 모를 얘기를 합니다. 망신이라 생각했겠지요.
인터넷 상에서 몇 차례 겪었는데, '깨달음'에 대한 대화가 좋게 이루어 질리가 없다. 법륜, 도올은 좀 다를까요?
내가 잘 몰랐다, 그 부분은 부족했노라...고 솔직하니 인정해야 그나마 깨달음에 한 발 다가서는 것이다,
사방천지 모자란 위인들 속에서 예수는, '돼지 한테는 진주를 던져주지 말라'고 질타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