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안에 있는 것을 낳으면...(도마복음 중에서)
이런 글을 읽을 때는 글쓴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명료하게 떠오르지 않을 겁니다. 머릿속이 와글와글하고 산만해져
있을겁니다. 도대체 집중이 안된다, 그래서, 진리의 말씀을 들을 때는 흔히 딴 짓을 합니다. 들으면서 하품을 하거나,
옆을 쳐다보거나, 딴 생각을 하며 주의가 산만한 모습을 보입니다.
집중이 되질 않으니 나중에 뭔 말을 들었는지도 기억이 안납니다. 용케 집중했더라도 긴가 민가, 무슨 소린가 하면서
흐릿하기만 합니다. 자신이 아는 범위 내에서 편한대로 해석하거나 흘려 버리고 만다, 그러니 문 열고 나가면 다 잊어
버린다, 게시판 글들은 제목만 보고 클릭을 하는데 조횟수가 백 회 정도라면 제법 사람들의 관심을 끈 편입니다.
봤어도 들었어도 도무지 뭔소린지 모르겠다, 이 말은 결국 '이 세상 얘기가 아니다' 라는 말과 같습니다.
사람들의 관심이 없다고 해서 그것을 뭐라하기 보다는, 글을 봤어도 뭔소린지를 모른다, 그런 딱한 사정은 글쓰는 이도
마찬가지다. 좀 아는 것 같아도 제대로, 다 아는 것이 아니다, 자기자신도 모르면서 남한테 섣불리 전하는 경우도 있지요.
진리는 속세의 일과는 반대되는 곳에 있다, 속세의 일이란게 그만큼 진리로부터 멀리 떨어져 버린(타락한) 것입니다.
백 년 전에 이 세상에 왔다 가신 '증산'은 말씀했습니다. "남 잘되게 하는 공부를 해라"
우리가 어려서 부터 많이 들어 온 '홍익인간' 사상, 즉 널리 남을 이롭게 한다...도 같은 말입니다,
그러나 눈 뜨면 부딪치는 일상의 삶에서는 정반대의 말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비싼 밥 먹고 왜 남 좋은 일을 하냐...?'
사람들이 진리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며, 부처나 예수가 다시 나타나서 설법을 하더라도 외면당하고
말 것입니다. 사람들한테 뭇매나 맞지 않으면 다행이랄까...ㅠ
■ 본문
"네 안에 있는 것을 낳으면, 네가 낳은 그것이 너를 살릴 것이요,
네 안에 있는 것을 낳지 못하면, 네가 낳지 못한 그것이 너를 파멸시킬 것이다"
【영문 例】
If you bring forth what is within you what you bring forth will save you.
If you do not bring forth what is within you what you do not bring forth will destroy you.
이는 '도마복음서'의 난해한 구절입니다. 저는 예수가 했다는 이 말(문장)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기독교 등의 특정종파와 상관없이(초월해서), 이 말은 명상이나 정신과 치료영역에서도 통하는 말입니다.
이 문장이 무슨 뜻인가요? 아냐 모르냐를 묻는 것이기에 듣자마자 대답이 튀어나와야 합니다.
■ 해설
'bring forth'란 '낳는다'는 뜻입니다. 여자가 아이를 낳거나, 또는 무엇을 새로 태어나게 하는 일에 쓰입니다.
'네 안의 것을 낳는다' 란 표현을 한 것은, '가짜 나(fake self)'를 진짜 나(true self, 의식 그 자체, '참 나', 하나님)로
부터 떼어내는 일을 말합니다. '가짜 나'는 불가(佛家)에서의 眼.耳.鼻.舌.身.意(六根, 즉 主觀의 경계영역)로 이루어진
일상의 나, 즉 自我입니다.
두 개의 나, 즉 진짜 나와 가짜 나 를 구별한다는 것은, 순수의식(알아챔, 만물을 있는 그대로 비추이는 거울, 스크린과
같음)인 '참 나'로 부터 '가짜 나'를 분리해냈다, 그래서 '낳았다'라고 한 것입니다, 여자가 아이를 낳을 때 처럼'가짜 나
(자아)를 분리해 낸다'는 뜻으로서 적절한 표현이다, 그렇듯, 자아(꾸미고 가꾼 나)란 것은 너의 '본질'이 아니니라,
그 자아는 자유의지를 통해서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겁니다. 새로 태어났다(낳았다)는 뜻의 우일신(又日新)
도 같은 말입니다. '너 자신을 알라' 든지, 데카르트의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등의 말도 연상됩니다.
'네가 낳은 것이 너를 살릴 것이다'
'참 나'로 부터 떼어 낸 '가짜 나(자아)'는 일상을 경영하면서 나를 먹여살리는 나 입니다. 뼈빠지게 고생하고, 노심초사
애를 쓰는 나, 즉 내 육신/생각/감정/오감 입니다. 그것이 하는 일은 마땅히, 일상에서 나를 부양하는 일이지요, 그래서,
save (자아를 떼어내어 말을 잘 듣도록 부린다) 라고 한 것입니다.
참 나와 가짜 나를 구별하지 못하고 유착된 상태에서는 그게 생각처럼 잘 되지 않습니다. 다음 문장으로 넘어갑니다.
'네 안의 것을 낳지 못하면 그 낳지 못한 것이 너를 파멸(destroy)시키리라'
'가짜 나' (자아)를 '참 나'로 부터 분리해 내지 못하면, 그 '가짜 나'가 너를 파멸시키리라' 이는 경구(警句)지요.
반드시 파멸하리라...그런 뜻은 아니다, 동서고금 인류의 대부분은 이런 것이 있는 줄도 모른채 살다 가니까...
그렇담 내가 나를 어떻게 파멸시킨다는 것인가?
그것은 각자의 '업장, 업보' 때문일 수도 있고, 아래에 나열된 1~4번 일 수도 있습니다.
'가짜 나'를 '참 나'로 부터 분리시키지 못하면, 자아는 하릴없이,
1. 탐/진/치에 눌어 붙어서,
2. 고정관념, 선입견에 사로 잡혀서,
3. 과거로 부터의 타성과 습관에 붙들려서 내 존재를 망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4. 자기(自我)의 고집과 못된 성질, 자존심 따위를 상황에 맞도록 고치고 적절히 다루지 못한다면. 그 종놈(자아, 가짜 나)이
주인(순수의식, 알아챔,'참 나')을 거꾸로 부리게 될 터이니(도로에서 주행하는 차들에게 홀려서 '감각운전'을 하다가 그만
정신줄을 놓고 사고쳐서 저 세상으로 가거나 하는 일을 연상해 보십시요), 온갖 좌절과 실패, 파경/파산/파탄, 질병과 죽음 등
세상에 널려있는 것들입니다.
연이나, 이런 것(지식)을 하나 더 알았다고 해서, 깨달았다 또는 사람이 변했다 와 같은 일들은 일어나지 않으리라.
알음 알음이 하나 더 생긴 것 뿐이다, 내 안의 자아(가짜 나)를 '참 나'로 부터 분리, 떼어내는 것(=낳는 일), 그 실천에는
'자아'의 죽음을 맛봐야 하는 일(taste death), 곧 나 한테 익숙한 자아를 폐기시키는 일, 속세와의 '일단 이별' 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일단 이별(離別)이라 함은, 컴퓨터를 포맷한다 즉, 싹 밀어내고 프로그램을 다시 깐다, 그리고 나서 세상을 다시
맞이하는 겁니다,
이별, 죽음을 맛본다, 세상 지식과 경험을 다 내려 놓는다...고 하는 험한 경지를 치뤄내지 않고, 말씀(經典 등)만으로 깨달음을
얻는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하여 '불립문자(不立文字)'라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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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많이 '안다' 라는 것은 이 세상살이에서는 재산이고 생존의 무기인데 이 중요한 것을 '없이 한다', 무장해제 시키는 것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의 길이 어려운 것은, 나(자아)를 현실세계로 부터 분리시킨다, 무효화시키는 (절체절명의)결심이
필요한 까닭입니다. '이 세상살이를 그만 살아도 좋다' 라는 처절한 결심을 해야만 한다,
'한 알의 밀알이 썩어서(나, 자아, 이제까지의 관념을 버림) 새 싹을 낸다' (깨달음을 얻음).
'안다'는 것은, 다분히 '세상만물'에 대한 나의 이해(理解)수준을 말하는 것인데, 이는 단정(斷定)과 편견을 포함해서,
결국 사물에 대한 고정관념이다. (사람을 새로 가르치는 일은 어렵다. 차라리 암껏도 모르는 사람을 가르치는 일이 쉽다)
이미 알고있는 기왕의 지식 (앎, 사물을 대하는 필터/색안경)이란 것은, 세상만물을 '있는 그대로'(=海印,청정무구,
새로움)보는데 방해가 된다, 세상만물을 대할 때, 내가 알고 있는 지식(대상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붙여진 딱지)을
없이 해라, 그렇게 세 살 어린애(삼척동자)가 되어 수행하는 지난한 과정(增得)이 깨달음의 경지(난 몰라!)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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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백지상태'가 되어 새 기운을 받을 때는 반드시 삿된 기운도 같이 따라 들어온다 하여 도고마성(道高魔盛)
이라 합니다. 깨달았다는 사람 중에는 스스로 '미륵대상제'(彌勒大上帝)라며, 엎드려 다섯 번 절을 해야 만날 수 있다는
자존망대(自尊妄大), 자가당착(꼭지가 덜 떨어진)에 빠진 사람이 있던데 이는 삼천포로 빠진 증거입니다.
우리는 '순수의식' 그것 하나만 주인으로 모시면 되는 것이다, 육체란 것은, 그것이 예수의 부활이건 부처의 진신사리가
되었건 숭배나 신앙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신앙의 본질은 의식, 영성이며, 육체는 그것을 담는 그릇에 불과하다. 어찌
그릇(자아, 가짜 나) 따위을 경배하리오? ('우상숭배'지요. 신앙에서 '육체'는 내 몸 또는 성인의 몸, 개미 한 마리, 뜰 앞의
잣나무...가 모두 다 동격<同格>의 피조물일 뿐) 산 사람을 대할 때는 적절한 예의를 갖추면 되는 것입니다. 끝.